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이내 죽고 싶어졌다. 그순간 “모든 걸 먹어치우다 자신의 입술마저 먹어버린 그 사람.”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만 좀 먹어라”
카페에서 책을 읽던 와중에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모녀의 대화를 엿들었다. 모녀라고 하면 왠지 중년의 여인과 사춘기 즈음의 소녀가 생각날 것이므로, 모녀라고 하기엔 아직 조금 이른 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30대 초중반의 젊은 엄마와 네 다섯살 정도의 꼬마 아가씨였으니까. 아무튼 그 꼬마 아가씨는 나이에 맞지 않게 정말 잘 먹었다. 탁자 위에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빈 껍질들과 뽀얀 속살을 자랑스레 뽐내는 생크림 케익들만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지만, 입가에 잔뜩 묻은 양상추나 딸기잼에서도, 옷 위로 켜켜이 쌓인 과자 부스러기에서도 몇 분 전까지 탁자 위에 온전히 놓여 있었을 간식 꾸러미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냥 먹게 좀 내버려 두지' 라는 생각도 들었으나, 탁자 앞에 놓인 조각 케익들의 칼로리를 어림산 해 보니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엄마의 잔소리는 푸석하게 부서지고 마는 유통기한 지난 빵조각 같은 것이었기에, 아이도 결국 그 조각 케익들을 마저 다 먹은 뒤에야 엄마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정말 잘 먹었던 그 꼬마 아가씨는 조금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탓에 초봄에 몽실몽실 피어나는 홍매화 처럼 이제 막 터지려는 듯 보였다.
그 정도의 식탐을 가지고 “욕심” 이라고 한다면 애기 엄마가 대노할 일이겠지만, 그 순간 문득 “자신의 입술 마저 먹어버린 그 사람” 이 떠오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에뤼시크톤이풍요의 신인 데메테르의 말을 거역하고 신전 근처의 나무를 자르자, 분노한 이 여신은 굶주림의 신을 에뤼시크톤의 배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날부터 에뤼시크톤은 계속되는 허기에 시달렸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딸 까지 팔아치우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에는 한계가 있어서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을 먹을 수 밖에 없었는데 자신의 입술까지 다 먹어버린 후에야 씹기를 멈추었다고 한다. (그리스신화 중)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죽고싶어졌던 때가 떠올랐다.
내게 처음 온 이 우울이라는 손님은 금고를 모조리털어먹고 도망친 도둑놈을 처단하기 위해 찾아온 자객과도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자객들은 기어이 이 도둑놈을 찾아내고야 말았으므로, 나는 이 지구 어디에도 내가 숨을 곳 따위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했다.
자객들은 내 몸을 꽁꽁 묶고는 온종일 시커먼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서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오롯이 그 까만 눈만을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한 것이다.
그 눈동자들은 너무나도 깊었으므로줄곧 "무덤"이 떠올랏다. 망자를 묻기 위해 파내는 구덩이. 구역질나는 쓰레기를 처리하듯 사람들은 땅을 파고 또 팟다. 망자의 냄새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혹여 기적이 일어나 관 속에서 그 누군가가 예수처럼 부활한다 하더라도 다시 이 세계에는 발을 딛지 못하도록. 왜나하면 죽음은 언제나악취가 났으므로, 옷깃 조차 스치기도 싫은 것이었으므로.
그래서 무덤이 생각난 것이다. 그 눈들은 무덤만치 깊고 어두웠다.
그래도종종 그곳에는다른 놈들이 끌려오기도 했기에 나는 조금쯤 안심할수 있었다.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 심연을 알수 없는 그 눈동자도 조금은 이해할수도 있게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우울은 나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것이어서 나는 무척부끄러워졌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시험에 떨어지면 나는 또 감옥에 갇혔고, 온종일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자객들의 시커먼 눈동자가 무서워 이내 죽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 자객이란 놈들은 우습게도 꽤 나 계산적이었어서, 쓸만한 뇌물을 내놓으면 금세 놓아주곤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험에 떨어진 날이면 될 수 있는대로 스테이크며, 옷이며, 가방따위를 정신없이 내놓곤 했다. 아마 그놈들은 신념 따위는 없는 용병이었던듯 싶다. 아니면 자본주의에 찌들어버린 수전노였거나.
그랬기에 인간이란 본질적으로 고독한 존재여서 외로워질 뿐이라는 명제는 단지 현학적인 수사에 불과했다. 내게 우울이란 지독히도 형이하학적인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배설 후에 사라지고 마는 욕정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그랬던것은 아니었다.특히 이별은더.
사랑이 시작되면서 모든 걸 먹어 치우는 에뤼시크톤처럼 나는 상대의 모든걸 먹어치웠다. 시간도마음도, 그리고 마지막엔 자유까지도.
하루에도 수십통씩 위치 보고를 하고, 친구를 만나지도 못하게 하면서, 멋대로 사과를 강요했다. 내가 정한 헌법 안에서애인은 죄인이었다. 죄인의 비명소리는 날카로웠지만엄마의 잔소리처럼 연약한 것이어서 허공에서 부서지는 빵조각 마냥 그저 이리저리 흩날릴뿐이었다. 아마도 그건 일종의 자폐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별 후에도 나는 한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 밖에 없었다.
먹어버린 마음은 꽤나 중독성이 강한 것이엇으므로.
그러니 그 서성거림은 남겨진 일말의 애틋한 정 따위로 이야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잔해처럼 널부러진 뼈다귀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뜯어 먹을 게 남아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리는 한 마리 하이에나 같은 것이라면 모를까. 그런 감정들은 종종 두 음절로 표현되곤 했다.
“자니?”
그랬기에 더 이상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즈음, 나는 끝없이 추락할 수 밖에 없었다. 채워지지 못한 대장의 욕망은 대뇌를 마비시켰으므로,
머리는 늘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윗배 쯤에 가 붙어있었다.
시커먼 시간 들이 지나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엔, 나는 그 우울이 너무 오래됐기에 이번에는 나 자신 마저도 모두 먹어 치워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울과 욕망과 집착 따위가 뒤섞인, 그야말로 골룸이었다.
“마이 프레셔스”
참, 골룸도 그 프레셔스와 함께 추락했었지?
아무튼 반지의 제왕을 생각해보면 이 문제의 해법은 조금 오묘하다. 프로도 일행은 끓어오르는 용암 아래로 절대 반지를 던져버린다. 소설에서 제왕이라면 의례 무언가를 정복하는 자, 성취하는 자 따위로 묘사되기 마련인데, 반지를 파괴 시킨 자에게 반지의 제왕이란 이름을 붙였으니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제왕이 정복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절대반지는 폐쇄같은것 이었다. 한번 끼면 잘 빠지지도 않았기에 결박을 의미할런지도 모른다.암흑의 시대 라고 표현되듯 반지는 반지의 소유자도, 소유자의 세계도 그 반지와 같은 깊은 어둠으로 만들어 버렸다.그곳은 오직 반지와 반지와 반지에 지배당한 오크들의 끝없는 자기복제만이 존재할 뿐이었기에,타자를 받아들일 그 어떤 공간도 없었기 때문에.
그러니 어쩌면 정복된 것은 그 모든 “빈 공간” 일지도 모른다. 절대반지가 사라진 작은 공간으로 빛이며, 꽃이며, 나비들이 날아들었으니까.
짜장면을 싫다고 하신 어머니 앞 빈 그릇처럼 결국 모든 세상도 그 밥그릇만한 공간을 이유로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이유로, 애뤼시크톤이 떠올랐던 것이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딸까지 팔아치우고 마지막에는 자기 자신마저 먹어버린.
그런데 자신의 입 마저 먹어버린 애뤼시크톤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신화에는 애뤼쉬크리톤의 죽음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다리부터 천천히 먹어치우다 입술 마저 먹어버렸다” 라니 쉽게 죽음을 연상할 법하다. 그러나 애쉬크리톤이 살아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건 왜일까. 입술은 먹어버렸으나 혀는 먹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입술 없이 새하얀 치아와 혀만 남아 또 다른 먹잇감을 찾으며 지금도 어디엔가 둥둥 떠다니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