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트렌드
얼마 전 공개된 BMW 신형 7시리즈는 상당한 화제를 불러 모았습니다. V12 엔진의 단종, 전동화 파워트레인 탑재, 뒷좌석 천장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 등 눈여겨 볼 부분이 많았는데요. 기능적인 부분 외에도 BMW 세단 최초로 분할형 헤드램프가 적용된 점이 이목을 끌었습니다. 같은 시기 공개된 BMW X7의 부분변경 모델도 마찬가지로 분할형 헤드램프를 장착해 BMW 디자인 큐의 변화를 예고했는데요.
BMW 뿐 아니라 최근 출시되는 많은 신차들이 위-아래로 나눠진 분할형 헤드램프(split headlamps) 디자인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2010년대 일부 브랜드의 SUV에서 시작된 이 트렌드는 이제 다양한 브랜드의 다양한 모델, 심지어 세단까지도 번지는 추세입니다.
처음에는 낯설어 보였던 분할형 헤드램프, 지금도 신선한 스타일을 매력적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요. 불과 몇 년 사이 분할형 헤드램프는 어떻게 대세로 떠올랐을까요?
사실 자동차의 헤드램프를 몇 개의 부품으로 쪼개놓은 차는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가령 피아트 물티플라(1998), 폰티액 아즈텍(2000) 같은 모델들이 헤드램프와 차폭등을 분리해 배치하는 스타일을 선보인 바 있습니다. 2010년 출시된 닛산 쥬크 역시 차폭등과 방향지시등을 상단에, 원형 헤드램프를 하단에 배치해 스포티하면서도 오프로더 감각이 살아 있는 디자인을 선보입니다.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몇몇 차종에서나 볼 수 있는 특이한 디테일일 뿐이었죠.
분할형 헤드램프를 본격적으로 장착한 차량은 2013년 등장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모델이 거의 동시에 출시됐는데요. 바로 지프 체로키와 시트로엥 C4 피카소입니다. 이들은 LED 주간주행등을 상단에 눈썹처럼 배치하고, 헤드램프를 아랫쪽에 배치했습니다. 지프 체로키는 실험에 그쳤지만, 시트로엥은 이후 다른 모델로도 이 디자인 큐를 확대해 이듬해에는 유럽에서 큰 히트를 친 C4 칵투스를 통해 분할형 헤드램프 디자인을 정착시킵니다.
첫 출시 당시 호불호가 심하게 갈렸던 이 디자인은 2017년 코나의 출시와 함께 현대자동차 SUV 라인업에도 도입됐고, 기아 역시 셀토스, 3세대 쏘울 등 일부 크로스오버 모델에 적용했습니다. 쉐보레도 2019년 블레이저를 시작으로 분할형 헤드램프를 적용하고 있으며, 그 밖에도 캐딜락, BMW, 미쓰비시 등 많은 브랜드가 분할형 헤드램프를 속속 도입 중입니다.
자동차의 특정 디자인 요소를 다른 회사가 참고하거나 따라하는 경우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분할형 헤드램프 만큼 뚜렷한 특징을 여러 회사가 앞다퉈 적용하는 건 이례적입니다. 그 배경에는 심미적, 제도적, 기술적인 이유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선 갈수록 엄격해지는 보행자 충돌 안전 규제를 큰 이유로 들 수 있습니다. 보행자 안전 때문에 헤드램프가 바뀐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안전 규제가 디자인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합니다.
최근 신차안전도평가(NCAP)에서는 보행자 충돌 시 부상 최소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충돌 시 보행자가 받는 충격을 분산시키고, 다리 부상을 최소화하면서 차체 위로 타고 넘어갈 수 있도록 자동차의 전면부를 최대한 평평하고 넓은 수직면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화되는 추세입니다.
이처럼 전면부의 수직면이 넓어지면서, 제조사들은 이 넓은 면이 밋밋해 보이지 않도록 다양한 디자인 요소를 집어넣기 시작합니다. 특히 전고가 높은 SUV의 경우 기존과 같이 하나의 헤드램프만 장착하면 남는 면이 많아지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헤드램프를 두 개로 나눠 배치하게 된 것이죠.
이처럼 헤드램프를 분할하면 기술적인 이점도 생깁니다. 최신 자동차의 헤드램프는 대부분 LED 광원으로 만들어집니다. LED는 광원 크기가 작고 밝아 헤드램프 디자인 자유도를 높일 수 있는데요. 다만 LED에도 단점이 있으니, 바로 엄청난 발열량입니다. 할로겐이나 제논(HID) 램프 대비 훨씬 많은 열을 내 훨씬 큰 냉각 설계가 요구됩니다.
최신 자동차는 하향등과 상향등, 방향지시등, 차폭등, 주간주행등까지 모두 LED를 사용하는 만큼, 이 모든 광원을 하나의 헤드램프에 통합하면 냉각장치의 부피가 커 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능을 나누어 배치한 분할형 헤드램프는 냉각 효율도 우수하고, 헤드램프 부품의 부피를 줄여 디자인 자유도를 높이기도 수월합니다.
마지막으로 분할형 헤드램프를 적용하면 얻을 수 있는 심미적 효과 또한 적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헤드램프가 배치되는 자리에는 날렵한 상단 램프가, 그 아래에 하단 램프가 배치되기 마련인데요. 이러면 자연스럽게 날렵한 상단 램프가 시선을 잡아 끌면서 보다 역동적이고 스포티한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습니다. 두 개로 나눠진 헤드램프가 미래지향적인 분위기를 더해주는 것 또한 장점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많은 브랜드들이 분할형 헤드램프를 속속 도입하고 있습니다. 원조 격인 시트로엥은 전 모델이 분할형 헤드램프를 장착 중이고, 현대차 역시 캐스퍼부터 팰리세이드에 이르는 모든 SUV 라인업이 분할형 헤드램프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프리미엄 브랜드 중에는 신형 7시리즈와 X7에 분할형 헤드램프를 탑재한 BMW 외에 아우디도 콘셉트카를 통해 분할형 헤드램프의 도입을 예고했습니다.
물론 모든 브랜드가 동조하는 건 아닙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BMW와 아우디의 변신에도 싱글 헤드램프 디자인을 고수하고 있으며, 미니멀리즘 디자인을 지향하는 테슬라 역시 분할형 헤드램프 적용을 딱히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닛산이나 기아처럼 모델에 따라 헤드램프 디자인을 달리 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럼에도 분할형 헤드램프를 채택하는 차가 늘어나는 건, 그만큼 자동차 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과거보다 훨씬 많은 신차가 쏟아져 나오는 시장에서, 조금이라도 더 특이한 디자인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제조사들의 생존 싸움인 셈이죠.
분할형 헤드램프는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자동차 디자인 트렌드입니다. 앞으로도 몇 년 간 이런 디자인이 적용된 차를 여럿 볼 수 있을 전망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성을 표현하는 방법인 만큼, 너도나도 비슷하게 생긴 차를 만들게 되면 또 새로운 디자인이 등장할 것입니다. 다음 세대에는 어떤 참신한 헤드램프 디자인이 등장하게 될까요?
글 · 이재욱 에디터 <피카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