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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꼬 Feb 15. 2024

5. 출동하라, 슈퍼커브!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저녁이었다. 이맘때가 되면 나와 집사람 둘 다 바쁜 시기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우리 집에 아이들을 돌봐주러 와계셨다. 아이들과 저녁을 먹고 빨래를 개면서 티브이를 보고 있는데 곧 있으면 집으로 오겠다던 집사람이 오도 가도 않고 소식도 없었다. 준비해 놓은 음식을 얼른 먹이고 싶은 마음에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디야? 왜 안 와?"

"아니, 배달 대행업체 시스템이 먹통이 돼서 기사님 배차가 안되고 있어. 두 개 남았는데 언제 오실지 몰라서 기다리고 있어."

음식점을 운영하는 집사람은 두 건의 배달을 보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번쩍 무언가 스쳐갔다.

"내가 갈까?"

"자기가?"

"지금이라도 내가 가?"

"자기가 오는 시간에 이미 기사님이 가져가지 않으실까?"

"언제 올지 모른다며."

"그렇긴 한데..."

집사람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가야겠다는 결심이 서자마자 바깥 상황이 궁금해졌다. 온도는 영하 10도. 오토바이를 탄다면 저 아래 깊숙이 숨겨둔 나의 소중하고 여리디 여린 그 부분부터 서서히 얼어갈 날씨다. 망설여졌다. 한번 더 물어봐야 했다.

"어떡해? 지금이라도 가?"

"올 수 있어?"

오라는 뜻이다. 가야 한다. 가야만 한다. 이러려고 산 오토바이다. 지금이 아니면 무엇을 위해 오토바이를 타야 한단 말인가? 만약 나중에라도 집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는 지금의 상황에 오토바이가 있으면서도 추워서 도와주러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얼마나 실망스럽고 한심하겠는가? 그러니 가야 한다. 설령 내 몸이 얼어 도막 도막 길 위에 흩뿌려진다 할지라도 가야만 한다.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이다. 가야 한다.


바지를 벗고 체육복을 덧입은 뒤 그 위로 다시 두껍고 불편한 바지를 입는다. 경량 패딩을 꺼내 두른 뒤 그 위로 두툼한 패딩을 한 겹 더 걸친다. 그걸로도 불안해 지퍼를 채운 뒤 똑딱이 버튼을 꼭꼭 잠근다. 바라클라바를 머리에 씌우고 넥워머도 장착! 추위에는 장사 없다. 만반의 준비만이 살 길이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채워지자 지체 없이 지하 주차장으로 향해 멋있게 장막을 걷었다. 아니, 걷으려 했는데 멋있게는 빠졌다. 낑낑거리며 앞뒤로 짱짱하게 씌워진 덮개를 걷어내고 서둘러 헬멧과 장갑을 착용했다. 장갑을 두 겹으로 낄려니 쉽사리 들어가지 않았다. 젠장. 도와주질 않는구나. 준비하는 데만 10분 걸리겠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바이크에 올랐다. 번호판을 단 후 공식적인 첫 라이딩을 멋있게 시작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여유는 없었다. 서둘러 스로틀을 당겨 집사람의 가게로 향했다.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가게의 불은 꺼져있었고 문은 굳게 잠겨있었기 때문이다. 멋있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

"어딘데? 내가 갈게!"

하며 멋진 등장을 하려 했던 나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얼른 전화기를 꺼내어 보았다. 집사람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네 통이나 와 있었다. 아뿔싸. 서둘러 준비를 하느라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지 못했던 것이 실수였다. 얼른 집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집사람의 역정이 들려왔다.

"전화를 왜 안 받아?"

"미안. 어떻게 됐어?"

"하나는 기사님이 오셔서 가져갔고 하나는 내가 가는 길에 가져다 드리려고 그랬지."

"지금 어딘데?"

"가게 지하 주차장. 아니 왜 전화를 안 받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곧 가겠다고 말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이게 아닌데. 이처럼 저기압일 때 내 새끼를 보여주려던 게 아닌데. 공교롭게도 되어버렸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차를 빼려는 집사람의 차와 마주했다. 집사람은 내려오는 사람이 나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듯 길을 피해 주려고 했다. 그러다 운전석 유리창에 가까이 다가가자 창문이 스르륵하며 내려갔다. 집사람의 표정이 영화관 자막처럼 서서히 드러났다. 표정은 곱지 않았다. 하... 망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겠는 상황에 내 표정 또한 얼어버렸다. 능청스럽게 오토바이에서 내려 물건을 전해 받았다.

"뭐야?"

집사람의 물음에도 못 들은 척 배달 제품을 오토바이 앞 바구니에 실었다.

"뭐냐고? 어디서 난 건데?"

집사람의 압박에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빌린 거야."

하고 답했다. 빌렸다고? 왜 그런 말을 했지? 지금도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빌리긴 뭘 빌려. 어디서 난 거냐고?"

"샀지."

그 뒤로 집사람은 말이 없었다. 집사람 눈치를 한번 흘낏 본 후 얼른 오토바이를 몰아 배달지로 출발하는 걸로 이 상황을 피해버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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