꽥꽥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나서도 이 녀석을 제대로 예뻐해 줄 기회가 좀처럼 쉬이 오지 않았다. 주말마다 잡힌 가족 일정으로 딱히 어디를 갈 수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추운 날씨 때문에 오토바이를 타고 공도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이유가 컸다. 안중근은 나라를 위해 손가락 한 마디를 내어 줬지만, 나는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 내 소중한 손가락 한 마디를 내어 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겨울철 오토바이의 고질병인 배터리 방전을 피하기 위해 딸아이랑 근처 치킨 픽업을 가본 게 그간 나들이의 전부였다. 아, 새로 산 유아용 안전벨트도 시험 삼아 착용할 겸.
뒤에서 나를 꼭 붙들고 있으면서도 코너를 돌 때마다 꺅꺅 소리를 질러대는 딸아이가 참 낯부끄러우면서도 귀여워서 더 화끈하게 팬 서비스를 선사했다. 그런데 가속을 올릴 때마다 딸아이가 뒤로 나가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폭풍 검색 끝에 운전자와 동승자를 연결할 수 있는 안전벨트를 구매했는데, 결론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가방처럼 생긴 안전벨트를 운전자와 함께 연결하니 안정감도 훨씬 좋아졌고, 무엇보다도 딸아이가 내내 나를 꼭 잡고 있지 않아도 괜찮아졌다. 이런 물건 개발한 사람 상 줘야 해!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서서히 갈증이 쌓여갈 때쯤이었다. 딸아이 생일을 스키장에서 현란하게 보낸 후, 가족 다 같이 집에서 쉬기로 한 일요일 아침.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지도 않은 집사람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자기야. 베트남 직원이 갑자기 오늘 못 나온데."
나 역시도 잠이 덜 깬 상태였던지라 이게 무슨 영문 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집사람을 답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아무 말도 없자 집사람은 포기하는듯한 한숨을 내쉬고는 얼른 준비를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다닥 하며 집사람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비몽사몽 한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와 보니 시계가 가게 오픈시간인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선 집사람 마음이 얼마나 급했을지 짐작이 갔다. 일순간에 독박육아의 전선에 뛰어들게 된 나는 잠시 소파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아니 사실 잠을 깨려고 노력했다. 어느 정도 차분히 앉아 아이들이 틀어둔 만화채널을 보고 있자니 슬슬 잠도 깨면서 생각이란 게 머릿속에서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몇 가지 명제가 생겼다.
1. 우리 애들 나이 올 해로 10살 12살. 지들끼리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나이이다.
2. 사전 예고도 없이 결근한 괘씸한 베트남 직원 때문에 지금 집사람의 마음이 말이 아닐 것이다.
3. 고로 지금은 애들 케어보다는 우리 마누라 심성 케어가 더 절실하다.
완벽한 3단 논법이다. 지금이 바로 늘어진 몸을 일으켜 피폐해진 집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러 내가 출동해야 할 때이다.
아이들에게 죠리퐁과 우유로 적당히 아침을 차려주면서 선심 쓰듯 물었다.
"얘들아. 어제 우리 스키장 다녀온다고 패드를 많이 못 봤잖아. 서운하지?"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구동성으로 '응'하고 답했다.
"그럼 아침 먹고 오늘 할 숙제 다 하면 패드 볼 수 있게 해 줄까?"
싫다고 할리 없었다.
"아빠는 엄마 도와주러 잠깐 나갔다 올 거야. 점심 전에 올 테니까 너희들끼리 게임하고 있을 수 있지?"
이전 보다 더 크게 '응'하는 대답에서 아이들만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대견스러운 내 새끼들. 언제 이렇게 컸나. 감성에 젖을 여유도 없이 온몸을 무장했다. 엄동설한에 얼어 죽지 않으려거든 그나마 바닥을 드러내는 패션 감각일랑 넣어두어야 했다. 아래위 쫄쫄이 내복에 청바지와 후드티, 그 위로 두꺼운 패딩을 입어 온몸을 무채색으로 코디했다. 하지만 괜찮다. 내 꽥꽥이가 샛노란 유채색이니.
꽥꽥이의 시동을 걸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을 나설 때는 항상 설렌다. 주차장 출구 쪽 저 멀리 보이는 밝은 빛을 향해 속도를 올리면, 마치 배트맨이 배트포드(배트맨의 오토바이)를 타고 긴 터널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연출될 것만 같다. 실제로 어딘가 비치는 내 모습을 발견하면 경악할 정도로 볼품없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꽥꽥이와 함께 뻥 뚫린 도로 위를 굉음과 함께 시속 60km의 고속(?)으로 달린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살이 떨어져 나갈 듯한 추위가 온몸에 전해진다. 으. 춥다. 구석구석 파고드는 냉기가 몸통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니 저항할 틈 없이 몸이 순간적으로 움츠러든다. 10분 정도의 거리인데 몇 번 다녀봤다고 제법 코스도 익숙하고 여유도 생긴다. 바람은 차고 온도는 낮지만 풍기는 향기에서는 금방이라도 봄이 올 것만 같다.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계절을 먼저 느끼게 됨은 꾀나 익숙한 일이다. 바람에 적극적으로 맞서다 보면 계절이 변하는 그 미묘한 향기를 맡을 때가 있다. 나 역시 젊은 시절 계절이 변하는 향기를 맡던 추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어서 잘 안다. 아직 봄이 오려면 수개월은 더 기다려야겠지만, 지금 이 느낌만으로도 오토바이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집사람 가게에 도착해 헬멧을 벗지 않은 채로 카운터로 저벅저벅 걸어가니 배달 기사인 줄 알고 물건을 챙겨 내주던 집사람이 깜짝 놀란다. 자주 보던 기사님이랑 닮았나? 내 모습이 그렇게도 이질감 없었나? 얼굴을 온통 가려 놓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나인걸 알아차린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대타 근무자가 도착해서 안 그래도 집에 가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예기치 않은 근무로 기분이 상해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밝은 표정을 보니 다행이지 싶어 안도했다. 피곤할 테니 집에 가자고 하는 나에게 집사람이 먼저 카페 데이트를 제안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횡재다. 이 녀석을 데려올 때부터 바라던 그림이다. 잠깐 집에 있는 애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이제 충분히 집에서 기다릴 수 있는 나이가 됐으니 걱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집사람에게 근처 카페로 이동하자 했다.
나는 꽥꽥이를 타고 집사람은 성공의 상징 중형 세단을 몰아 카페로 향했다. 신호 대기 중 꽥꽥이를 그녀의 차에 바짝 붙이니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준다. 처음 나를 향해 섭섭함을 쏟아내던 그녀를 떠올리면 참 많은 변화를 받아들인 대인배란게 새삼 실감이 나 진심으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카페에 마주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이야기의 주제는 대부분 집사람의 가게와 관련된, 자영업자들의 애환과 같은 주제다. 이번 달 매출이 어떻다거나, 인건비가 얼마나 나왔다거나, 옆 상가에 어떤 가게가 새로 생겼다거나. 집사람이 장사를 시작하기 전에는 대부분 육아와 관련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가게를 시작하면서는 대부분 이러한 주제들로 자연스레 이야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아마 그만큼 하는 일에 관심을 많이 쏟고 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사실 나에게 대화 주제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여유로운 카페. 모닝샌드위치에 따뜻한 커피. 마주 앉은자리에는 시간이 갈수록 나와 더 말이 잘 통하는, 나와 내 아이들을 자신보다 더 소중히 생각해 주는, 나를 사랑하는 그녀. 이 정도 조합이면 예전 어느 카드 회사 광고 카피에서 읊은 것처럼 'priceless'다. 꽥꽥이와 긴급 출동 대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