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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미고 Jan 14. 2022

커튼과 고양이.

안방에 암막 커튼을 새로 달았다. 이미 달려있는 화이트 시폰 커튼은 속 커튼 역할 정도로, 동향인 우리 집에 새벽녘부터 들이치는 따가운 햇빛을 전혀 차단해 주지 못했다. 애초에 암막 커튼을 겉 커튼으로 같이 달았으면 되었을 텐데 미련하게 일 년을 넘게 참고 살았다.


커튼을 새로 달기 위해 기존 레일을 떼어내고 이중으로 다시 다느라 여동생과 키 작은 여자 둘이 개고생을 했다. 힘이 달려 커튼 박스 안에 드릴을 한 번에 못 밀어 올려서 여기저기 시도하다 애먼 구멍만 10개를 넘게 만들고, 커튼레일을 끼우는 브라켓이 대자, 소자 구분이 돼 있다는 것을 몰라서 톱밥 마셔가며 애써 박은 나사를 조였다 풀었다 생쇼를 했다. 전문가가 와서 눈대중으로 드르륵 박았으면 10분도 채 안 걸렸을 텐데, 한 시간 반 여를 목이며 팔이 떨어져라 올려다보며 작업을 하니 천장화 그리는 미켈란젤로가 된 것 같다는 아무 말이 나왔다.


동생은 이제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않겠다 했지만 고생해서 이룬 결과물은 꽤 훌륭했다. 커튼을 쳤을 때 구김 없이 물결치는 모양을 위해 나비 주름을 택하고, 만 원을 추가해 형상기억 다림질 옵션을 추가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우리  호랑이 래미는 커튼을 거대한 대형 스크레처 정도로 인식한  같다. 아침에 뭔가 긁는 소리가   침대 매트리스 모서리를 긁고 있나 했는데 새로  커튼을 넝마로 만들고 있었다. 하필 갈고리 같은 고양이 손톱에 걸리기  알맞은 약간 굵은 직조물이라 손맛이 좋아 착착  감겼는지 왼쪽 오른쪽 골고루 야무지게도 긁어놓았다.


양옆 위아래 사방을 당겨서 팡팡 펴니 올이 나간 자국이 없어지진 않지만 오그라진 부분은 대충 펴진다. 실밥이 튀어나와 너덜너덜해지고 빵꾸가 난 부분도 보이지만 너무 속상해하지 않기로 했다. 커튼을 걷어 놓으면 주름에 가려 표시가 잘 안 나고 커튼을 치고 자는 어둔 밤에는 어차피 아무도 커튼을 보지 않는다. 다만 내가 어느 부분이 누더기가 되었는지 알고 있을 뿐이다.


무릇 암막 커튼이라 함은 그 이름에 걸맞게 햇빛만 잘 막아주면 된다. 내일 또 신나게 걁걁해 놓으면 팡팡 펴면 될 일이다. 과거의 내가 더 비싼 커튼을 달려고 욕심내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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