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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재호 Feb 17. 2022

내가 ‘작가’라니 07.

18개월이 걸리다니

나는 학창 시절부터 ‘엉덩이’가 제법 무거운 편이었다.


미술을 준비하면서부터 그랬다.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다니며 즐겁게 실기 준비를 하던 친구들과 달리, 그림이 엉망이어도 나는 제자리에 곧 잘 앉아있었다.

운 좋게 들어간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며 조금은 몰려다닐 친구가 생겼지만, 관성 때문인지 혼자만의 시간은 계속해서 필요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 시간이 스스로에게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져 '군대에 가기 싫을 정도'였다!

합법적인 병역 기피를 위해 정보처리 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IT 회사에 어렵사리 취직했고, 그곳에서 2년 8개월을 더 앉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좀이 쑤셨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갖게 된 취미가 '커피'였는데, 점차 더 좋은 커피를 찾게 되며 생두를 직접 사서 볶아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본업인 디자인에 이렇다 할 경쟁력을 느끼지 못하면서 무미건조한 컴퓨터 화면만 마주하던 중 오감을 자극하는 커피는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다양한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커피를 하며 알게 된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커피에 깊이 빠져들수록 여기저길 찾아다니느라 내 엉덩이는 조금씩 가벼워졌지만, 삶은 더욱 풍부해져 갔다.


결국 디자인보다 커피에 대한 확신이 커지면서 2010년 카페 프랜차이즈 회사에 취직했고, 난생처음 커피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였다. 그 전에는 주변인들이 대부분 3Ds Max나 Cinema 4D 따위로 생각을 표현할 줄 아는 이들이었기에 디자인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커피 하는 사람들은 SketchUp을 다루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라테아트 하는 디자이너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보잘것없던 내 능력이 꽤나 괜찮은 '무기'였음을 깨달았다. 디자인에 염증을 느껴 커피 산업에 몸담았건만 다시금 본업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 카페 창업의 실패로부터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디자인이었다.

결국 다시 괄약근에 힘을 준 채로 커피와 디자인 사이에서 삶의 균형을 잡는 법을 익혀나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단련된 엉덩이 힘으로 책을 썼다.


2020년 7월 용인에서 가진 첫 인터뷰를 시작으로 2022년 1월 파주의 한 인쇄소에서 감리를 보기까지 18개월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집필에만 오롯이 하루를 보낸 날은 별도로 플래너에 기록해뒀는데, 무려 168일에 달했고 그렇지 않은 약 380일 간에도 머릿속은 온통 ‘살아남은 카페들’에 집중해야 했다.

자나 깨나 책 생각뿐이었다.


인테리어 공사는 짧으면 한 달에서 길어야 2-3개월 정도 기간이 소요되기에 이렇게 긴 호흡으로 한 가지 프로젝트에 매달려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중간에 공사 의뢰가 들어와 본업에 집중한 시간을 차치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책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예상했지만, 이토록 오랜 시간과 많은 에너지를 요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여러 클라이언트들과 깊은 얘길 나눌 수 있어서 좋았고, 레고 블록같이 알록달록한 그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재조립하는 일도 즐거웠다. 심지어 책을 함께 내기로 한 이들과 지지고 볶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쓰며 느낀 모든 감정이 내가 처음 커피에 빠져들게 된 지점들과 많은 부분 닿아있었다. 어쩌면 이 책은 18개월 전이 아니라, 커피가 좋아진 그 순간부터 쓰여 왔는지도 모르겠다.


벌써부터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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