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개월이 걸리다니
나는 학창 시절부터 ‘엉덩이’가 제법 무거운 편이었다.
미술을 준비하면서부터 그랬다. 여기저기 우르르 몰려다니며 즐겁게 실기 준비를 하던 친구들과 달리, 그림이 엉망이어도 나는 제자리에 곧 잘 앉아있었다.
운 좋게 들어간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며 조금은 몰려다닐 친구가 생겼지만, 관성 때문인지 혼자만의 시간은 계속해서 필요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 시간이 스스로에게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져 '군대에 가기 싫을 정도'였다!
합법적인 병역 기피를 위해 정보처리 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군 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IT 회사에 어렵사리 취직했고, 그곳에서 2년 8개월을 더 앉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좀이 쑤셨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갖게 된 취미가 '커피'였는데, 점차 더 좋은 커피를 찾게 되며 생두를 직접 사서 볶아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본업인 디자인에 이렇다 할 경쟁력을 느끼지 못하면서 무미건조한 컴퓨터 화면만 마주하던 중 오감을 자극하는 커피는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다양한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커피를 하며 알게 된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커피에 깊이 빠져들수록 여기저길 찾아다니느라 내 엉덩이는 조금씩 가벼워졌지만, 삶은 더욱 풍부해져 갔다.
결국 디자인보다 커피에 대한 확신이 커지면서 2010년 카페 프랜차이즈 회사에 취직했고, 난생처음 커피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였다. 그 전에는 주변인들이 대부분 3Ds Max나 Cinema 4D 따위로 생각을 표현할 줄 아는 이들이었기에 디자인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막상 커피 하는 사람들은 SketchUp을 다루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라테아트 하는 디자이너라니···!'
그 말을 듣는 순간 보잘것없던 내 능력이 꽤나 괜찮은 '무기'였음을 깨달았다. 디자인에 염증을 느껴 커피 산업에 몸담았건만 다시금 본업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 카페 창업의 실패로부터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디자인이었다.
결국 다시 괄약근에 힘을 준 채로 커피와 디자인 사이에서 삶의 균형을 잡는 법을 익혀나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단련된 엉덩이 힘으로 책을 썼다.
2020년 7월 용인에서 가진 첫 인터뷰를 시작으로 2022년 1월 파주의 한 인쇄소에서 감리를 보기까지 18개월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집필에만 오롯이 하루를 보낸 날은 별도로 플래너에 기록해뒀는데, 무려 168일에 달했고 그렇지 않은 약 380일 간에도 머릿속은 온통 ‘살아남은 카페들’에 집중해야 했다.
자나 깨나 책 생각뿐이었다.
인테리어 공사는 짧으면 한 달에서 길어야 2-3개월 정도 기간이 소요되기에 이렇게 긴 호흡으로 한 가지 프로젝트에 매달려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중간에 공사 의뢰가 들어와 본업에 집중한 시간을 차치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책을 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건 예상했지만, 이토록 오랜 시간과 많은 에너지를 요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여러 클라이언트들과 깊은 얘길 나눌 수 있어서 좋았고, 레고 블록같이 알록달록한 그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재조립하는 일도 즐거웠다. 심지어 책을 함께 내기로 한 이들과 지지고 볶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쓰며 느낀 모든 감정이 내가 처음 커피에 빠져들게 된 지점들과 많은 부분 닿아있었다. 어쩌면 이 책은 18개월 전이 아니라, 커피가 좋아진 그 순간부터 쓰여 왔는지도 모르겠다.
벌써부터 다음 이야기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