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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우씨 May 12. 2021

여왕의 세 가지 매력 - 퀸스 갬빗

영화플레이리스트 #18

내용은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요약이 가능하다: 냉전이 끝나지 않은 20세기 중반, 체스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소녀 엘리자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이 등장한다. 부모에게 외면당하고 보육원에 맡겨진 그녀는 알코올 중독과 약물 중독의 그늘에서 벗어나 우여곡절 끝에 체스판 정점에 오른다.


월터 테비스의 1983년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한 시즌으로 내용이 완결되는 리미티드(limited) 시리즈다. 2020년 10월 공개된 이후 넷플릭스 리미티드 시리즈 관련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웠고, 37년 전에 출간된 원작 소설까지 베스트셀러가 됐다. 신드롬으로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인기였다.



이제 질문은 드라마가 끝난 이후부터 던져진다. '왜?' 1983년에 나온 이 소설이 이제 와서 드라마로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렇게까지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모든 걸 결과론적으로 해석하면 이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것에 찬사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이 흥행하는 데에는 작품성이라는 말로만 설명할 수 없는 우연적 요소가 개입한다. 우리는 '바로 지금' 이 드라마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작품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 급류에 휩쓸려 이 작품만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도록.


'매력'을 정의하는 관점의 변화


이 작품은 외견상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보일 요소가 있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정점까지 상승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K드라마'에서 많이 봐왔던 흐름이기도 하다. 그 진부함에 혀를 차면서도 정신 차려보면 다시금 채널을 돌리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졌다는 것이 신데렐라 스토리의 강점이다.


한 가지 주시할 사항은 신데렐라도 진화한다는 점이다. 오로지 미모라는 강점을 가지고 성공한다는 스토리는 이제 K드라마에서조차 쓰지 않는다. 우린 더 이상 외모에만 감동을 받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인스타그램의 '돋보기'는 우리에게 끝도 없이 다양한 미모의 스펙트럼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예쁘고 멋진 사람은 차고 넘친다. 그들 중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발산하려면 소위 말하는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한다. 그건 지적 능력이 될 수도 있고 집안 배경이 될 수도 있으며, 성격이나 화술이 될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자신만의 강점이 있어야만 이 치열한 미모의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퀸스 갬빗>의 엘리자베스가 바로 뛰어난 외모와 함께 그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체스 실력을 가졌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려는 의욕 또한 충만하다. 그는 소위 말하는 '노력하는 천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는 엘리자베스가 결국엔 정점에 가닿을 거라는 희망을 작품 내내 느낀다.


익숙한 신데렐라 스토리에 플러스 알파를 더했다는 장점은 <퀸스 갬빗>을 진부하지 않은데다가 쉬운 드라마로 만들어준다. 어쨌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보면 되는' 드라마인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은 체스 드라마라는 외형을 하고 있어 체스에 관해 알고 있어야 드라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시대적 배경을 잘 살려 체스 경기장을 실감나게 재현한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아주 간단한 룰을 설명하는 정도가 아니면 체스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시청자는 구글에 '체스 룰'이라는 검색어를 기입하며 기꺼이 복습에 나섰다).


하지만 이 쉬움이 <퀸스갬빗>이 가진 매력의 전부일까? 자세히 살펴보면 엘리자베스의 능력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이 작품엔 도핑 테스트가 있는 시대였다면 엘리자베스가 양성 판정을 받아 경기에서 탈락을 했을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퀸스 갬빗> 속 능력 있는 신데렐라가 두른 능력치의 권위를 의심하게 한다. 그 체스 실력은 온전히 그의 것인가? 이 문제는 21세기 들어 다시 한 번 화두가 된 능력주의(meritocracy)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마이클 샌델이 최근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제기한 문제, 더 이르게는 1948년 마이클 영이 '능력주의의 등장'에서 제기한 바로 그 이슈다.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능력주의 세계를 살고 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에 합당한 성과물을 향유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관점이다. 프리즘을 K드라마에서 K팝으로 잠시 옮겨보자.


K팝의 능력주의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연습생이었던 10대 소년 소녀들이 오로지 그들의 능력만으로 빌보드 차트 최상단까지 올라가는 꿈 같은 스토리로 포장된다. '하면 된다'의 후손인 한국인은 이 내러티브에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능력이야말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흙수저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그렇듯, 센델은 이번에도 예리한 질문을 던져온다.


그러나 샌델을 비롯해 능력주의의 문제점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이 사고방식이 한 사회를 위험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우리는 승자의 자신감이 오만으로 변질되는 것을 자주 본다(혹은 그들의 오만을 우리가 자신감으로 포장해준다).


이 말은 패자의 위축된 마음이 자책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누군가 자기 능력으로 성공했다면, 누군가는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실패한 게 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자기 힘으로 성과를 이뤄낸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주지만, 반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겐 절망감을 안긴다. 이 두 감정의 제로섬(zero-sum)은 우리 사회를 그저 승리와 패배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며 삶의 의미를 축소시킨다.


만약 예리한 저널리즘으로 무장한 어떤 기자가 엘리자베스의 능력에 의문을 제기했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이때 이 스토리는 신데렐라 이야기에서 단번에 다큐멘터리로 장르가 변경 될 것이다. <체스 신동의 그늘: 엘리자베스 하먼의 초록색 알약> 정도면 제목으로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는 세계 최강의 체스 선수 보르고프와 최종 대결에서 분명 자기 실력으로 승리한 게 맞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그려가는 신화 초반부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가 때때로 알약(일종의 진정제)을 먹지 않았다면 진작 패배할 수도 있었고, 그때 승리가 없었다면 엘리자베스는 체스 선수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성공이 손상을 입지 않길 바란다.



이것은 우리가 불의해서가 아니라, 예쁜데 능력까지 좋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주의 사회의 뒤안길에서 우리 모두가 한 번씩은 상처받은 경험이 있어서다. 너무 많은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요구하는 세상의 문 앞에서 한번쯤은 고개를 숙여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엘리자베스의 승리를 확인하려고 이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닐 것이다. 그가 어떻게 스스로를 위기에서 구출하는지 보기 위해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드라마가 끝난 뒤 우리를 감싸고 있는 현실을 둘러보면, 우리가 흔히 능력의 승리라 말하고 있는 것들에 얼마든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반드시 알약 문제에 천착하지 않더라도 엘리자베스가 체스를 잘 둘 수 있는 그 능력 역시 부모에게 물려받은 좋은 두뇌와 관련 있다. 즉 우리가 흔히 '성취재'라고 간주하는 능력조차 그 하나하나를 미분해 보면 우리가 실제로 성취한 건 하나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능력과 성과만으로 승자에게 모든 것을 계속 몰아줘야 할까?


이렇듯 <퀸스 갬빗>은 완벽해 보이는 엘리자베스의 성공 신화조차 사실은 전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리 시대의 성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퀸스 갬빗>의 또 다른 매력이다.


타인들에 의해 완전해지는 소금쟁이의 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는다. 신데렐라가 가진 능력과 성공이 오롯이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받은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이 질문은 <퀸스 갬빗>이 갖고 있는 세 번째 매력으로 연결된다.


<퀸스 갬빗> 초반부의 힘은 엘리자베스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는 아역 배우(아일라 존스턴)에게서 나온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어린 엘리자베스는 끊임없이 세상과 불화하며 아웃사이더 기질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리지만 웬만한 성인보다 불온해 보이는 이 아이는 타인과 차분하게 감정을 교류하거나 스스로 마음을 정돈할 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약물에, 때로는 술에 빠져 시간을 허비한다.


'여왕'을 구출하는 것은 언제나 타인이다.


그런 그를 구출하는 것은 언제나 타인이다. 엘리자베스에게 처음으로 체스를 가르쳐준 보육원 관리사 샤이벨은 그가 체스 선수로 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처음엔 그와 경쟁 관계였으나 엘리자베스의 실력에 매혹돼 자발적으로 그의 도우미가 된 수많은 남성 선수들 또한 엘리자베스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보육원에서 만난 유일한 친구 졸린은 갖가지 사건을 겪으며 감정적으로 붕괴하고만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잡아주며 그를 위기에서 구출한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이 오로지 자기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처음엔 '알약'이 없었다면, 그 뒤로는 주변 사람의 손길이 없었다면, 어느 때라도 자신의 체스 인생이 끝났을 것이라는 점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보르고프와 최종 대결이 끝난 뒤에도 그는 승자의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대신 거리에서 체스를 두고 있는 '노상의 실력자'들을 진지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세상을 한없이 까칠하게 보던 한 소녀의 입가에는 이미 따뜻한 미소가 띄워져 있다.


체스판의 정점에 오른 뒤에도 그는 '승자의 오만'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흑백의 그 체스판들 하나하나에는 살벌한 전략과 술수, 트릭과 심리전이 가득하다. 충만한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이 특별한 여성은 그렇게 평범한 건 아무 것도 없다는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다.


짧지만 강력한 <퀸스 갬빗> 서사의 아우라는, 혼자서는 능력주의의 이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갈 수 없음을 은연중에 깨닫고 있는 우리에게까지 온전히 도달해 다음 수를 고민하게 만든다.



끝도 없이 높게 솟은 탑들이 불타서

사람들이 그 얼굴을 기억하도록,

움직이려거든 아주 조용히 움직여라

아무도 없는 외로운 이곳에서.

그녀는 생각한다, 일부는 여인이고, 나머지는 아이인 그녀는,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녀의 다리는

길에서 배운

거리의 춤을 연습한다.

시냇물 위의 소금쟁이처럼

그녀의 마음은 침묵 위를 움직인다.


-윌리엄 예이츠 '소금쟁이' 일부. 이 작품은 원작소설의 도입부를 열어준다.






영화잡지 '무비고어' 제1호에 수록된 원고입니다.

저 외에도 뛰어난 필진들이 참여한 무비고어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귀띔해 드리자면, 무비고어 측에서 새 필진을 물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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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고어 손정빈 편집장 인터뷰(오디오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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