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우씨 Oct 14. 2021

'어바웃 타임'의 숨겨진 1인치: 삼촌 데즈먼드 이야기

영화플레이리스트 #21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2013년작 '어바웃 타임'은 흥미로운 기록을 갖고 있다. 이 영화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은 흥행 수익을 올렸다. 영화가 제작된 영국이나 미국보다도 한국에서 많은 호응을 이끌어낸 것이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한국인들의 숫자는 거의 340만 명이나 된다.


한국에서 개봉한 영국영화 중 흥행 1위였음은 물론, 미국을 뺀 나라의 외화 중에서도 최고의 흥행 기록을 기록했다(애니메이션을 합치면 '너의 이름은'이 1위).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는 '한국인들이 특별히 사랑하는 외국영화'다.


About Time(2013)


복잡한 숫자를 거론할 것도 없이 이 영화를 인생영화로 꼽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동명의 드라마 '어바웃 타임'이 2018년 tvN에서 방영됐다는 점, '눈이 부시게'나 '고백부부' 같은 작품들에 영향을 줬다는 점도 '어바웃 타임'의 의미를 더해준다.


한국인이 특별히 사랑하는 영화


영화의 내러티브는 논리보다는 감성의 흐름을 따른다. 21살이 된 모태솔로 주인공 팀은 아버지에게 특별한 비밀을 전해 듣는다. 집안의 남자들에게 시간을 돌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 방법은 간단하다. 벽장 안으로 들어가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영화는 시간 돌리기를 위한 거대한 장비나 복잡한 과학적 원리 같은 걸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 '그냥' 할 수 있다. 아울러 타임워프라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그리고 그 집안의 남자들)은 시대의 불의나 범죄와 싸우지 않는다. 그저 주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시간을 돌릴 뿐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벽장 안으로 들어가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


거대한 능력을 갖고도 주변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설정은, 조금 삐딱하게 보면 소시민적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에 승선한 모든 승객들을 다 구할 수 있음에도 자기 가족만 구출하는 느낌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이과적 접근보다는 문과적 이해가 필요한 작품이다. 정색하고 보기보다는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주목하는 편이 좋다.


이런 방식으로 작품을 바라보면 조금 새롭게 다가오는 인물이 하나 있다. 영화에서 종종 등장해 엉뚱한 대사를 던져 관객들을 의아하게 만드는 의문의 남자 – 데즈먼드 삼촌이다.


삼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영화에서 데즈먼드 삼촌이 나오는 씬이 많지는 않다. 주로 팀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단란한 장면에 데즈먼드가 함께 한다. 삼촌은 언제나 말쑥한 정장 차림인데, 멀쩡한 외견과는 달리 엉뚱한 말을 툭툭 던진다. 영국식 조크인가?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말을 들은 주인공들의 미소가 약간 미묘하다.


데즈먼드 삼촌


분명한 건 데즈먼드가 가족들 사이에서 깊이 사랑 받는다는 사실이다. 팀이 또 다른 주인공 메리(레이첼 맥아담스)와 결혼할 때 그의 아버지가 스피치에 나서는데, 아버지는 자신이 일평생 사랑했던 '3명의 남자' 중 한 사람으로 데즈먼드를 꼽는다. 나중에 삼촌은 팀에게 "네 아버지가 이름을 불러준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고 말한다.


첫 번째 가능성: 시간여행의 부작용?


데즈먼드가 혼자서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뭘까. 처음엔 삼촌이 시간여행을 너무 많이 해서 혼란이 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설정에서 시간 돌리기는 무제한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임워프 능력을 이용해 팀의 아버지는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었고, 누군가는 돈에 지나치게 탐닉하다 큰 낭패를 봤다. 그렇다면 데즈먼드 삼촌의 경우 너무 많은 시간여행을 해서 수많은 평행우주의 현실들을 혼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때가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어"


하지만 영화의 초반부, 팀이 가족들을 소개하는 장면을 유심히 보면 이 가설은 무너진다. 팀은 데즈먼드를 '엄마의 형제'라고 소개한다. 즉, 데즈먼드 삼촌은 외삼촌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시간여행 능력이 없다. 그는 알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로 독특한 언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과 연결되는 영화의 주제의식


데즈먼드에게 시간여행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이 영화의 독특한 설정을 새삼 짚어보게 됐다. 영화 속에서 시간여행 능력은 남자들에게만 전수된다. 같은 혈통이어도 팀은 시간을 돌릴 수 있지만 여동생 킷캣은 할 수 없다.


영화의 핵심적인 능력이 남자들에게만 전수되다 보니 이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필연적으로 보조적인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팀이 메리에게 접근할 때, 그는 반복된 시간여행으로 메리가 케이트 모스의 광팬이라는 점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마음의 지도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접근한 팀을, 메리는 '운명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팀과 메리


사랑이라는 이름의 사리사욕(?)을 앞세워 시간여행을 반복하는 팀에게 아버지는 또 하나의 ‘인생 꿀팁’을 전수해 준다. 평범한 일상을 산 뒤에, 시간을 돌려 똑같은 하루를 이번에는 보다 깊이 느끼면서 살아보라는 조언이다.


이 경험을 통해 팀은 일상의 사소한 부분에 좀 더 집중하고, 메리를 제외한 타인에게도 상냥한 나이스 가이로 거듭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가 하고자 하는 얘기가 드러난다. 21세기에 와서 그 의미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신사'의 재발견에 대해 이 작품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신사의 재발견


사전에서 신사(紳士)의 의미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온다: 사람됨이나 몸가짐이 점잖고 교양이 있으며 예의 바른 남자. 특별한 능력이 남자들에게만 전수된다는 설정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결국 신사의 품격에 대한 상상력을 우화적으로 펼쳐낸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데즈먼드 외삼촌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데즈먼드는 때때로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엉뚱한 소리를 해서 분위기를 '갑분싸'로 만들 여지도 많은 인물이다. 영화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걷어내고 직시한다면, 인지능력에 다소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다.


바꿔 말하면 그는 주변의 보살핌 없이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가 상당히 힘든,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중년의 남성이다. 영화는 그의 삶을 자세하게 추적하지 않지만, 추측건대 데즈먼드 앞에 펼쳐진 현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을 것이다.


어바웃 타임이 말해주는 '젠틀맨의 법칙'


이런 데즈먼드를 팀네 가족이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바라보면 '어바웃 타임'의 신사론(紳士論)이 윤곽을 드러낸다. 다시 한 번 작품의 첫 부분으로 시간을 돌려보자. 팀은 가족 구성원을 한 사람씩 소개하는데, 데즈먼드 삼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항상 잘 차려입었고 뭔가 생각에 잠겨있는 삼촌."


팀은 데즈먼드를 '어딘가 좀 부족하고 손이 많이 가는 삼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따뜻하고 아늑한 시선으로 삼촌을 바라본다. 팀의 이 관점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부모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팀의 부모는 팀과 그 여동생을 이렇게 양육해온 게 아닐까?


"얘들아. 데즈먼드 삼촌은 이상한 사람이 아니야. 항상 뭔가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지. 봐, 오늘도 저렇게 멋지게 차려입고 계시지? 지금은 삼촌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여쭤볼까?"



영화에서 팀은 여동생 킷캣의 불행을 막기 위해 여러 번 타임워프 능력을 이용한다. 작품에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팀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내의 둘도 없는 형제인 데즈먼드를 위해 그동안 많은 시간여행을 감행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생색 한 번 내지 않고 아들의 결혼식에서 피 한 방울 안 섞인 처남을 '가장 사랑하는 남자'로 거론해 주는 팀의 아버지는, 우리 시대 신사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팀의 아버지가 타임워프 능력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주변의 약자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고,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 채, 할 수 있는 선에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


한국인들이 이 영화를 이렇게까지 사랑한 이유도 어쩌면 이 언저리에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의 저간에 흐르고 있는 이 따뜻함의 정서야말로 '어바웃 타임'의 진짜 매력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주변을 사려 깊게 살피고, 시야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미소 지어라. 그것이 신사의 품격이므로.




일러스트 ⓒ도로잉님(@__do.rawing)

영화발골채널 '호우시절'에서 영화 '어바웃타임'을 리뷰하고 있습니다. 많이 들어주세요 :)

'호우시절' 오디오클립

'호우시절' 인스타그램

매거진의 이전글 중단된 야망 - 주피터스 레거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