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우씨 Feb 01. 2024

어떤 죽음의 파장

수많은 '나'들의 동시적 소멸

2023년 12월 27일. 한 배우가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를 죽인다는 의미의 자살(自殺)이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되고 있다. 한국기자협회의 ‘자살보도 권고기준’에서도 이 단어는 되도록 쓰지 않는 것을 권한다. 그 말을 자꾸 입에 담으면 그것이 더 많아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자살하는 한국인들은 별로 줄고 있지 않다.


꺼림칙한 단어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극단적 선택’이라는 우회적 표현이다. ‘선택을 하긴 했는데 너무 극단적이었다.’ 그것이 지금 한국 사회가 자살을 바라보는 각도다. 맨눈으로 보기가 두려워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살짝 벌린 손 틈 사이로 바라본다. 그렇게 하면 그 선택의 극단성이 조금은 잦아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너무 강한 빛 앞에서 선글라스를 쓰듯이 그렇게.



슬픈 방점은 선택(選擇)이라는 부분에 찍힌다. 스스로를 죽인다는 것이 어떻게 자발적 선택이 될 수 있을까 싶지만, 망자의 1인칭 시점으로 사태를 보려고 노력하면 의외로, 그리고 무섭게도 자살이 합리적 선택이자 책임감 있는 행동처럼 보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생전 그 사람의 어깨에 너무 많은 책임과 사회적 압력이 얹혀 있는 경우 더욱 그렇다. 


2023년 12월 세상을 떠난 배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매우 크게 성공한 배우였고, 개봉을 앞뒀던 영화는 제작비 180억원 규모의 대작이었다.


이후 그가 큰 성공의 그늘 안에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행동을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법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따르지만 여론은 반대다. 유죄추정이다. 영화는 개봉할 수 없게 되었고, 180억원의 회수 책임은 오롯이 그 배우의 어깨 위에 놓였다. 


같은 과정이 그가 계약한 광고, 그가 출연한 드라마 등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결국 그는 과거의 자신(정확히는 과거의 자신이 이뤄낸 성공)이 해놓은 약속들의 덫에 걸려 죽음을 택했다. 이후 그를 짓누르던 모든 책임과, 수사와, 대중의 비난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 일련의 메커니즘은 그가 창안한 것이 아니다. 이미 숱하게 많은 유명인들의 ‘극단적 선택’ 사례 속에서 학습된 절차다. 그에 대해 서술한 나무위키에 의하면 그의 종교는 개신교였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독실한 신앙을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기존에 갖고 있던 일말의 철학이나 종교적 두려움을 압도할 정도로 그가 내몰린 상황은 극단적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 극단적인 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라 그가 처한 상황이었다. 한 사람이 행한 잘못의 책임을 어디까지, 또 어느 정도로 묻는 것이 온당할 것인지를 짚어볼 때다. 그러고 나면 ‘극단적’이라는 수식어와 ‘선택’이라는 단어는 사실 물과 기름처럼 잘 섞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좀 더 잘 알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기자협회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최근 내놓은 권고기준 3.0에선 극단적 선택이라는 표현조차 보도시 지양할 것을 권하고 있다. 대신 권고되는 표현은 사망(死亡)이다. 하지만 자살과 사망을 완전히 같은 선상에 놓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니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이 배우의 죽음 이후 나는 두 번 정도 꽤 독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추모의 장면을 봤다. 하나는 그가 죽기 전까지 그의 마약 혐의를 수사했던 인천경찰청장의 추모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맥락의 추모는 아니었지만, 그는 분명 죽은 그 배우를 “나도 좋아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추모는 내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추모였다. 그의 죽음 이후 열렸던 어느 예배 현장에서 목사님은 그 배우에 대해 언급하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그를 처벌하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던 책임자, 그리고 자살을 강력히 금지하는 종교의 목회자가 공적인 자리에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드러낼 정도로 그의 죽음이 야기한 파장은 꽤 컸던 것 같다. 이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 특히 중장년층 남성들이 그 배우의 죽음을 특히나 아파했다. 여기에서 새삼스레 드러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포함해 그 배우가 연기했던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 배우는 그렇게 뛰어나거나 주변을 압도하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았다. 다양한 직업과 계층을 연기했지만 언제나 우리들 가운데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적당히 평범했고, 우리가 할 법한 생각과 행동을 했다. 그렇게 했을 경우 어떻게 되는지를 작품 속에서 잘 보여줬고, 그러면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의 바람직한 버전을 구현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올바른 길을 사색하게 했다.


쉽게 말해 그 배우는 많은 작품에서 우리를, 또 나의 일부를 연기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나의 아저씨’였던 셈이다.



그의 급작스런 죽음은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서 자신의 일부가 소멸되는 고통을 야기했던 게 아닐까. 수많은 ‘나’들의 동시적 소멸. 그저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연기했던 수많은 작품을 바라보며 사색했던 그 시간들이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시내처럼 흐르다 어느 순간 뚝 끊겨버렸다.


그의 죽음은 수많은 대중들 각자의 마음 안에 보존된 수많은 ‘나’들의 일부를 일거에 소멸시킨 학살적 상황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이 이 죽음이 야기한 절망적 파장의 실체이자 우리가 느낀 상실감의 원천일 것이다.


괴테는 “재산을 잃었다면 다시 모으면 되지만 용기를 잃었다면 그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만도 못한 일”이라고 말했다. 잃어버린 용기를 되살려 주는 것은 예술의, 특히 대중예술의 덕목이자 미덕이다.


슬프게도 이번 사례에서 목숨을 끊은 배우는 자신이 연기한 드라마에서, 절망에 빠진 자기 자신에게 누군가 해줬다면 참 좋았을 법한 대사를 그대로 연기하고 있었다.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그런 말들.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다고들 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 드라마’가 돼준 어떤 예술이 정작 연기자 본인에게 가 닿지 못했다면, 예술의 길고 짧음이란 대체 어떻게 측정해야 하며 어떻게 붙잡아야 하는 것인가. 일순간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게 돼버린다. 


남겨진 사람들은 그와 그의 예술이 건네준 온기를 알기 전의 휑한 상태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가 주었던 감동의 순서는 끝났고, 이제는 그의 죽음이 야기한 절망을 소분해 우리 모두가 나눠 갖는 순서가 찾아왔다. 그렇게 한 사회의 테두리 안에서 절망과 슬픔, 비탄의 총량이 보존된 채 공기 중에 떠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