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에서부터 AI로까지 흐르는 여정
처음으로 음악이라는 것이 인간의 바깥으로 튀어나왔을 때, 그것은 동시성의 산물이었다. 오로지 음악(혹은 음악에 가까운 원시적인 어떤 본능)을 연주하는 사람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속해있을 때에만 피어날 수 있는 순간의 예술이었다.
이후 녹음 기술이 발명되면서 많은 것이 변화했다. 그동안 연주(演奏)의 의미를 갖던 PLAY라는 단어에는 이제 재생(再生)이라는 의미가 함께 실리게 됐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논쟁이 시작될 수 있다. 동시성 없이, 그러니까 연주하는 사람과의 공명 없이 청자 일방적으로 재현시키는 음악 예술을 과연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음반 혹은 음원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이 논쟁의 발상 자체가 생경하지만,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에게는 아마 심각한 문제였을 것이다. 음악을 ‘영혼 간의 교류작용’으로 여겼던 사람이라면 “녹음된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을 법하다. 실제로 20세기 초반 일부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서 녹음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강한 거부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거친 충돌의 역사를 끌어안고 음반의 시대는 꽤 오래 이어졌다. 똑같은 음반의 시대 안에서도 재생 매체의 형태에 따라 호불호가 갈렸다. LP와 카세트테이프, CD 등은 각자 다른 매력과 한계를 가지고 음반의 시대를 군웅할거 했다.
단, 어떤 형태를 하고 있든지 간에 음반이 아티스트의 음악적 영혼을 나눠 갖고 있다는 생각을 의심하는 사람은 점점 사라져갔다. 실감 나게 녹음되었다면 청자는 잠시나마 그 음악이 녹음된 순간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류로 올라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생각나는 사례는 전설적인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다. 그는 1943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에서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하며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을 녹음했다. 전쟁은 이미 한쪽의 승리로 끝나가고 있었다. 독일의 공연장은 언제 공습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고, 푸르트벵글러는 절망적인 직감을 끌어안고 ‘운명’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친나치로 오해 받았지만 뒤로는 유대인들을 돕고 있었다.)
베토벤 ‘운명’ 교향곡을 녹음한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다수의 클래식 마니아들은 바로 이 1943년 6월30일 녹음본을 최고로 친다고 한다. 녹음 상태만 놓고 비교하면 현재의 것들이 훨씬 좋겠으나 푸르트벵글러의 압박감과 협연자들의 불안, 얼어붙은 한여름의 공기까지 통째로 녹음된 음원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는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다.
눈을 감고 이 음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덮쳐오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자세를 바로 하게 된다. 녹음이라는 행위, 그리고 그것이 집약된 음반이라는 매체에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큰 힘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음반이라는 매체는 비단 음악적 영혼만이 아니라 아티스트의 재산권 또한 나눠 갖고 있다. 음반은 연주의 시대가 주지 못했던 새로운 수익 창출의 기회를 열어줬다. 그 음반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사이에도 음반은 지구 어디에선가 팔려나갔고, 비틀즈나 마이클 잭슨 같은 뮤지션들이 막대한 음반 판매량의 힘으로 거부(巨富)의 반열에 올랐다.
이 패러다임은 MP3라는 새로운 압축 기술의 출현과 함께 또 한 차례 뒤흔들린다. 21세기의 시작을 전후로 등장한 미국의 냅스터, 한국의 소리바다는 음반에서 추출한 MP3 음원을 온라인 공간에 무차별적으로 살포했다.
한국 돈으로 장당 9000~15000원 사이에서 형성돼 있던 음반의 가격이 한순간에 ‘0’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음악인들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였다. 이미 이 무렵 음악이라는 예술은 재산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위기라고 생각했던 약 10여년 간의 분투와 투쟁 끝에 음악은 음반에서 해방된 채로도 충분히 아티스트의 재산 역할을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는 다시 한 번 기술의 힘이 필요했는데, 이 지점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단어는 스트리밍(streaming)이다.
이제 우리는 음악을 듣기 위해 데이터들이 떠다니는 구름(cloud) 가운데 각자가 선호하는 빨대를 꽂는다. 애플‧멜론‧벅스‧스포티파이‧유튜브 등의 이름을 하고 있는 이 빨대를 통해 음악은 우리들의 고막에 흘러 내려온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스트리밍의 시대다.
라이브로 연주된 것만이 진정한 음악이라 믿었던 음악의 조상들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면 무어라 말할지는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음악과 가까운 일상을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 등의 거대 SNS 매체들이 실시간으로 흘려보내는 숏폼 콘텐츠에는 거의 대부분 음악이 깔린다. 이제 음악은 영상의 재미를 위해 얼마든지 잘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장식품 같은 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템포를 빠르게 했다가 느리게 하는 식의 변형도 이용자의 취향대로 가능해졌다. 심지어 자신의 음악이 숏폼에서 자주 활용되길 바라는 아티스트 쪽에서 원곡에 대한 템포 변경 버전(slowed/sped up)을 정식 음원에 포함 시키기도 한다.
녹음된 음악은 진정한 음악이 아니라고 주장할 정도로 음악의 본질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을 가졌던 초기 뮤지션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사후세계 너머로 바라보는 지금 이 시대의 음악을 그는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의 연주나 노래가 숏폼에 사용되기라도 한다면 그는 아마 진지하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다만 그의 음악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음악의 주도권은 압도적으로 청자들에게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후대에 태어났다는 이점을 이용해 선대의 음악을 마음껏 오렸다 붙였다 할 수 있다. 우리의 음악 향유법을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녹음된 음원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똑같은 목소리로 자신들이 믿고 있는 음악의 본질을 충실하게 노래한다.
이제 다음 싸움은 무엇일까? 최근 유튜브에는 AI김광석, AI아이유 같은 가상의 가수들이 넘쳐난다. 한 가수의 목소리를 그가 부른 적 없는 노래에 입히는 것이다. 부르는 이의 진정성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결여된 이것을 진정한 음악이라 할 수 있을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런 건 진짜라 말할 수 없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AI김광석이 부른 ‘Yesterday’를 듣고 누군가 눈물을 흘렸다면 그 감동까지 거짓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
듣자하니 인공지능(AI)이 음악 창작까지 시작했다는 모양이다. 이제 “AI가 작곡한 음악은 진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할 차례다. 일련의 논쟁은 우리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 우리를 선대로 여길 만큼 까마득한 후세대에게 우리는 음악에 대해 어떤 주장을 했던 사람들로 남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