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탐을 하다가
남들은 내게 연금을 받고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부러워한다. 유유자적하게 연금 받으며 인생을 즐기며 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은퇴를 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유로운 시간, 해외여행, 새로운 도전, 새로운 만남 등이다.
그런데 그런 이상적인 생활은 아예 요원하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불과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연금은 현직 때 받던 월급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고정 지출은 빤한 데 쓰던 가락은 있고, 사람을 만나면 밥에 커피 한 잔까지 해야 하니, 그나마 가성비 좋은 인터넷 쇼핑으로 소확행을 누리고 있다.
최근에는 옷 탐에 빠졌다. 나는 소화기능이 약해 식탐보다는 옷 탐 쪽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나이가 드니 행색이 점점 초라해져 내가 너무 쓸쓸해지는 것 같다. 더 나이 들면 갈 곳도 없고, 찾는 사람도 없을 테니 부지런히 그나마 조금이라도 젊을 때 다 해보려는 심리가 작동하는 것이다. 옷, 구두, 가방, 스카프, 모자 등 소소하게 자꾸 물갈이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잘 차려입고 꾸미고 다니는 중이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입고 다니는 옷을 보고 심리적인 우울함의 척도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자주 옷을 갈아입지 않는 사람, 같은 옷을 계속 입고 다니는 사람, 갈아입어도 같은 계통의 옷을 계속 있는다면 우울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은퇴 몇 년 전부터 내게 그런 증상이 있었다. 옷장을 열어보면 안 입어 본 옷이 수두룩했다. 맵시가 있는 좋은 옷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이런 옷을 다시 입을 날이 올까?'라고 생각했다. 마치 낯선 사람의 옷장을 들여다보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스커트나 원피스는 거의 입지 않았다. 구두나 부츠도 신지 않았다. 출퇴근 시에도 운동화만 줄곧 신었던 기억이 난다. 드디어 은퇴를 하면서 출퇴근이 없어졌으니 그 신발을 신지 않게 되었고, 완전히 잊혀 진 채 고이 신발장 속으로 안착했다.
최근에 아주 하얗고 산뜻한 새 운동화를 샀다. 어떤 모임에서 운동화를 신을 일이 생긴 것이다. 잘 꾸며 입고 가고 싶은 생각에 질러 버렸다. 현관에서 언박싱을 하면서 옛날에 신던 그 운동화가 생각났다. 새 신발을 샀으니 외출용이라든가 산책용이라든가 뭐 그런 용처를 다시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 기억 속의 그런 운동화가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신발을 신고 다녔지?' 정말 의아할 정도로 군데군데 실밥이 터지고 밑창은 다 닳고 낡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분명 세탁해서 넣어 놓았는데도 너무 더러운 운동화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엉망인 운동화였다고? 마치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낯선 운동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은퇴 당시의 나는 그렇게 감각마저 둔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햇수로 따져 보니 5년이 넘은 운동화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시간은 멈췄던 것일까. 처음 샀던 그 반짝반짝하던 기억만으로 그 낡고 해진 신발을 새것이라 여기며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오래 신고 다닌 것이다.
그 당시의 나는 어디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내 인생의 답이, 남는 것이 떨어진 운동화 한 켤레와 같다면 정말 쓸쓸할 것 같다. 은퇴 후 1년이 지났지만, 못쓰게 된 물건을 바꾸듯 버려졌던 몸도 마음도 추스르고 돌보고 가꾸어 나갈 일이다. 나의 은퇴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