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인류멸망 시나리오
종의 흥망성쇠는 지극히 우연적이다. 지구의 자전축이 몇 도 기울어지거나 거대한 천체가 지구에 부딪히는 등의 일은 자연의 관점에서 있음 직한 일이다. 이러한 거대한 사건에 수 밀리미터에서 수십 미터 정도의 생물학적 개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어 보인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룡의 멸종을 공룡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다만 자연의 무심(無心) 앞에 겸손해질 뿐이다. 하지만 책임 묻기가 가능한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에는 일제강점기 이후로 호랑이가 멸종했다고 한다. 어디 조선 호랑이가 큰 잘못을 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무분별한 포획 때문이다. 굳이 도도새나 북극곰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최근 생물학적 종들의 위기는 인간의 의도적인 개입을 통해 발생한다. 인간은 자연의 먹이사슬 정점에 위치할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이를 걷어차버릴 이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종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생태계 질서를 함부로 주무를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많은 이들은 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리킨다. 인간의 두뇌가, 그 지성이라는 것이 여타의 종과 크게 구분되는 지점인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은 언젠가 인류의 역사에 대해 낙관한 적이 있다. 제아무리 염세주의자들이 냉소할지라도, 그리고 인류 역사상 수많은 멍청이들이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었음에도, 인류는 그럭저럭 위기를 잘 해쳐 나왔다. 그 결과 석기시대보다 지금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이 러셀의 반문이다. 나는 여기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과거보다 현재가 낫다는 것은 상당 부분 그럴듯하다. 스마트폰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누구도 유선전화 시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우리는 결국 해답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 맥케이의 <돈 룩 업>은 이러한 낙관주의를 비웃는다. 영화에서 제시하는 상황은 인류를 통째로 멸망시킬 혜성이 지구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알게 된 민디 박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그의 학생 디비아스키(제니퍼 로렌스)는 눈앞에 닥친 이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 인류가 늘 그렇게 해결해왔듯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올리언 대통령(메릴 스트립), 비서실장 제이슨(조나 힐), 그리고 피터(마크 라이런스) 등으로 대표되는 안티테제, 그러니까 반-지성적인 인간상을 제시한다. 영화가 이들을 그려내는 방식은 신랄하고, 또 괴랄하다. 불리한 선거를 이기고자 전 인류적 위기를 기회로 이용하고, 또 돌연 그 기회를 취소하여 다시 위기를 되살린다.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는 운석을 두고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위를 쳐다보지 마! (Don’t look up!)”
영화에서 위를 쳐다보지 말라는 집단은 단순히 몇몇 인간의 무식을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식으로 비롯된 반-지성적 의사결정들이 파멸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도 포괄한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낙관주의자들이다. 운석이 충돌할 확률이 99.78%인데도 제이슨은 100%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한다. 올리언은 그냥 70% 정도로 하자고 한다. 이 와중에 피터는 돈 벌 궁리를 한다. 운석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후 그 안의 광물을 캘 수 있다면 수십 조의 경제적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인데, 결과적으로 일자리 창출 및 인류 복지 증진에 도움 될 것이라고 한다. 꽤 괜찮게 들리나 그의 제안은 피어 리뷰(peer review)도 거부하는 반-지성적 접근법이다. 그리고 이들이 초래한 결과는 ‘세대가 다른’ 한 늙은 백인(론 펄먼)이 떨어지는 운석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처참한 비극으로 요약된다.
반면 위를 쳐다보라는 집단은 상당히 무력하게 그려진다. 반-지성적인 이들이 권력을 잡고 있다는 영화상 설정이 있기도 하지만, 디비아스키 혜성이 99.78%의 확률로 지구와 충돌할 것이라 계산해낸 지성인 치고는 너무 무력하다. 여기에 영화적 의도는 명확하다. 제아무리 지성적인 인간이라 할 지라도, 한낮 인간인지라 그 내면에 담긴 나약함이 최선의 선택을 방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디비아스키는 자기 성격을 못 이기고 국가기밀 누설죄로 침묵을 강요당하고, 민디 박사는 눈앞의 위기를 회피하며 브리(케이트 블란쳇)와의 밀회를 즐긴다. 머리 위에 파멸이 떨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말이다. 이러한 영화적 냉소는 지성에 대한 불신보다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우려에 가깝다.
<돈 룩 업>은 장면 중간중간마다 지구 상 존재하는 여러 생물들과 인간 삶의 다양한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이 생명의 이미지들은 하나같이 순수하고 무결한데, 위를 쳐다보지 않음으로 인해 치르게 될 엄청난 대가를 제시하는 것이다. 앞서 멸종의 책임이 그 종에게 전가될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공룡이나 호랑이는 스스로 멸종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책임 귀속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류는 <아마겟돈>처럼 핵미사일로 혜성을 맞출 수도, 인류 존속을 위해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만들 수도, 아니면 최소한 고개를 들어 하늘 위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 때문에 아마겟돈 작전은 취소되었고, 생식 능력이 결여된 늙은 이들만이 대피 우주선에 탑승하였다. 다만 뒤늦게 고개를 들어 혜성을 향해 무기력한 총질을 해댈 뿐이었다. 그렇게 영화는 반-지성이 초래하는 생명의 파멸을 보여준다.
본 주제에 벗어나지만 영화는 마지막을 맞이하는 올바른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고결함이다. 최후에 이르러 민디 박사는 아내와 화해하고, 디비아스키, 테디 박사(롭 모건), 그리고 그의 가족들과 함께 모여 최후의 만찬을 즐긴다. (정말로 그랬는지 불분명하지만) 이들은 그래도 최선을 다했노라고 즐겁게 마지막을 맞이한다. 급하게 도망치느라 자기 아들을 잊어버리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음주, 마약, 섹스, 절도, 폭력 등에 몰두하는 이들과 비교할 때, 저들의 최후는 올바르게 보인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담담하게 그간의 삶이 만족스럽고 행복했노라고 읊조리는 것이 멸종위기에 처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것이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통해 달 표면이 울퉁불퉁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천체가 매끈하게 잘 다듬어진 구형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뒤집는 놀라운 당대의 발견이었다. 하지만 그의 증명이 위대한 까닭은 난해한 수학이나 논리학 없이 그냥 망원경을 통해 달의 크레이터를 보여주었다는 것에 있다. 민디 박사와 디비아스키처럼 망원경을 통해 그냥 위를 본 것(just look up)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고집을 꺾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 신봉자들은 달 주변에 어떤 안개 같은 것이 있어서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 것일 뿐이며, 달은 여전히 매끈한 구형이라고 주장하였다. 황당하지만 여하튼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이러한 반-지성, 아니 무지성의 신봉자들은 오늘날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지구온난화가 거대한 사기라고 말하거나 백신에 소형 로봇이 들어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각종 통계수치를 들이밀거나 작동원리를 설명해도 이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러셀 식으로 생각하자면 괜찮을 수도 있다. 수많은 멍청이들이 존재해왔지만 인류는 지금까지 그럭저럭 잘 생존해왔으니까 말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는 <돈 룩 업>을 보는 내내 숨이 잘 쉬지 않을 정도의 답답함과 스트레스를 느꼈다. 영화에 너무 몰입한 탓이겠지만 머리 위에 죽음이 내려오는 와중에 다들 무슨 짓을 벌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지극히 정상적이지만 동시에 얼마나 낙관주의가 허술한지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수학 문제를 정확하게 풀어도 마킹에 실수해서 아는 문제를 틀리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니던가? 무지성주의자들이 권력을 잡는 시나리오는 더 이상 영화적 해학과 풍자가 아니다. 굳이 트럼프의 사례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당장 지금 이 코로나 시국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과학자들은 백신의 자국우선주의를 경고했지만 인류 문명을 선도한다는 선진국들은 이를 무시했고, 그 결과 계속되는 변이 바이러스를 마주하고 있다. 기후 변화 문제는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그 잘난 머리를 치켜들어 보려 하지 않는 풍조가 지속된다면, 이는 여러 인류멸망 시나리오 중 단연코 최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