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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Oct 04. 2022

<시라노; 연애조작단>

메시지와 메신저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사랑의 의미

메신저보다 메시지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영화인지를 알아보기보다는 그 영화감독이 누군지부터 확인하고, 또 ‘마블’과 같은 영화 브랜드에 더 주목하지 않은가. 사랑은 더욱 그렇다. 누군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우선 그 누군가가 누군지부터 확인하게 된다. 그래야만 사랑의 메시지를 두고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메시지는 순수할지라도 그 순수성은 메신저로부터 독해된다. 고백 명제의 진리값이나 의미상 문맥, 그리고 여기에 대한 나의 판단을 위해서는 메신저에 주목하는 것 말고는 딱히 다른 방안이 없다. 연애를 위해 얼굴, 패션, 몸매, 키, 성격, 재력, 지위 등이 고려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블라인드 데이팅의 취지나 영화 <그녀>에서 보여주는 통찰은 새롭다. 순수하게 메시지만으로도 사랑의 가능성을 묻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라인드 데이트의 끝은 안대를 벗어 메신저를 확인하는 것이고, 영화 <그녀>의 결말은 메신저의 오류 복구로 메시지가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관계를 시작하는 데 있어서 말(메시지)은 발화자(메신저)에 종속되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랑의 메시지를 연출하는 시라노 에이전시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유사한 소재를 다룬다. ‘시라노 에이전시’는 성공적인 사랑 쟁취를 위한 각본을 짜주고 실행해주는 회사다. 이들의 전제는 사랑의 판가름이 메신저보다 메시지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메신저가 철저히 무용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이 회사의 주 업무는 사랑의 메시지를 정교하게 다듬고 연출해주는 것이다. 이들의 업무인 ‘연애 조작’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이는 메신저(=배우)를 앞에 내세운 상태에서 사랑의 메시지를 각본, 연기, 영상 등을 연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작 활동은 곧 영화라는 매체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를 메타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는 메시지를 연출한다.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조작’이 되겠고, 중립적인 의미에서는 ‘최적화’가 알맞을 것이다.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 영화를 하나로 꿰뚫는 ‘스토리’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스토리가 보다 중립적인 단어의 선택이라면 메시지는 관객의 입장에서 “결국 이 영화에서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러이러하다’라는 명제에 확실성을 더해주는 것이 연출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 시라노 에이전시가 하는 일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명제가 진심으로 느껴지게 메시지를 조작 혹은 최적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바로 이들의 작업이 곧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과 상통한다.     


이 영화에서 이민정은 단지 미모만으로 영화적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저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결말 부분에 있다. 상용(최다니엘)의 뒤에 숨어서 옛 연인인 희중(이민정)에게 대신 메시지를 전달하던 병훈(엄태웅)은 시종일관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결말에 와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비즈니스적 이유를 고려하더라도 위기에 빠진 상용과 희중 앞에 나서는 장면이 그러하고, 회심을 담은 메시지를 희중에게 대신 전달할 때 병훈이 보여주는 진중한 눈빛이 그러하다. 이 순간만큼은 마치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라노처럼 보인다. 물론 결국 병훈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실패한 사랑이 가져다주는 씁쓸한 정서가 이 영화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메신저 뒤의 공허한 메시지가 아닌 또 다른 메신저로서 역할을 하는 병훈


오히려 이 영화는 사랑의 결말과 무관하게 메신저의 부재(뒤에 숨은 병훈)에도 사랑의 메시지는 의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영화가 영화 <엑스 마키나>의 대척되는 명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이바(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칼렙(돔놀 글리슨)에게 완벽한 여인이며, 결국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 그는 철저하게 배신을 당하는데, 사실 에이바가 내뱉는 모든 말과 행동에는 메신저로서 진심이 없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정리하자면 메시지의 완벽성에도 불구하고(M) 메신저의 진심이 없다면(~T) 그 사랑은 실패한다(~L)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즉, (M&~T)->~L).       

    

한편,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위 조건명제를 부정한다(즉, (~M V T) -> L). 메시지가 완벽하지 않거나(사랑을 얻은 어설픈 상용, ~M) 메신저의 진심(병훈의 회한, T)이 있으면 사랑은 성공할 수 있다(L). 여기에 영화적 초점을 맞춘다면,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을 알 수 있다. 완벽한 메시지와 메신저로서의 진심이 갖추어졌던 현곤(송새벽)은 결국 사랑에 실패하나, 실수투성이인 메시지를 날렸던 상용은 사랑에 성공한다. 이는 조금 부족한 사람이 사랑의 성공에 더 다가가기 쉽다는 교훈을 전해주는 것 같다. 위의 부정 명제에 따르면 메신저의 진심만으로도 사랑은 성공한다. 그렇다면 의아한 것은 병훈의 경우이다. 병훈은 결국 사랑에 실패하지 않았는가?     


아마도 이 영화에서 사랑의 의미는 단지 짝이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짝사랑이 어떻게 연애이며 사랑인지를 반문할 수도 있겠다. 사실 여기에 꽤나 진중한 철학적 논란이 있지만, 여하튼 이때 사랑의 의미는 더 넓게 볼 필요가 있다. 비슷한 경우로, 2019년에 개봉한 영화 <결혼 이야기>는 사실 <이혼 이야기>로 제목을 바꾸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혼인관계의 파국도 넓은 의미에서 결혼 생활의 한 부분이며, 이때 남녀가 겪는 고통도 궁극적으로 각자를 성숙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병훈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스로 진심을 깨닫게 되면서 뉘우치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재결합 여부와 상관없이 병훈의 사랑은 이미 값진 것이고, 또 이러한 의미에서 결코 실패한 사랑으로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숙해진 병훈 앞에 완벽한 메시지와 메신저인 민영(박신혜)이 나타나는 것은 결코 영화적 우연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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