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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Nov 06. 2022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영화의 가능세계와 전이된 비극

(1) 들어가기 전에: 가능세계 의미론

“이 영화는 재밌다.”라는 문장과 “이 영화는 X나 재밌다.”라는 문장을 비교해보자. 두 문장 모두 이 영화가 재밌다는 단 하나의 사실을 지시하나 어감에서 어째 다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전자와 달리 후자에서는 영화를 보는 즉시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지는 그런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X나”라는 부사는 이 영화가 재밌다는 사실을 매우 강력하게 만든다. 다른 문장을 들어보자.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동반 출연하였다.”는 문자 그대로 두 멋진 배우가 쿠엔틴 타란티노의 9번째 영화에 나온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하지만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동반 출연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문장은 앞서 “X나”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어감을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이 ‘~할 수밖에 없었다(could have been)’라는 표현은 원래의 사실에 대응하는 문장의 의미를 강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언어 표현에서 이 ‘강력한 어감’은 의미의 양상성(modality)에 의한 결과로써, 다른 표현으로 ‘필연성(necessity)’이라 할 수 있다 (반대 개념은 ‘우연성(contingency)’이다). 즉, 앞서의 문장은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필연적으로 동반 출연한다.”로 번역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필연성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두 배우가 필연적으로 동반 출연한다는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어떻게 판가름할 수 있을까? 실제로 두 배우가 이 영화에 같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는 아닐 것이다. 동반 출연한다는 사실 자체는 ‘필연적인 동반 출연’에 기여하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이니 ‘우연적’이니 등의 양상적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가능세계 의미론은 여기에 답을 준다.


두 배우의 동반출연은 '우연적'이기에 경이롭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이 역사, 이 우주는 현실세계(actual world)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안적인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가령 현실세계와 동일한데, 영화 <타이타닉>이 흥행에 실패해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3류 배우에 지나지 않는 대안 세계를 상상해보자. 직관적으로 이 상상을 막아서는 것은 없고,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아니기에 이러한 세계는 가능하다. 즉, 이러한 대안적 세계를 ‘가능세계(possible world)’라고 부른다 (주의: 물리학에서 말하는 평행세계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제 우리는 현실세계와 비슷한 역사를 공유하는 수많은 가능세계들을 상상해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금발이 아닌 흑발인 가능세계, 브래드 피트가 2022년까지 이혼하지 않은 가능세계,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10편이 아닌 11편을 찍고 은퇴를 하겠다고 공언하는 가능세계 등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신의 눈을 가지고 현실세계와 유사한 수많은 가능세계들(주의: ‘아예 지구가 없는 가능세계’와 같은 현실세계와 너무 동떨어진 가능세계들은 제외한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고 해보자. 상식적으로, 이러한 가능세계들 중에서 분명히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 동반 출연하지 않은 어떤 가능세계가 최소한 하나 이상이 있을 것이다. 가능세계 의미론에 따르면 이 경우 두 배우가 필연적으로 동반 출연한다는 명제는 거짓이다. 바꾸어 말해서, 두 배우는 우연적으로 동반 출연하는 것이다. 즉, 필연성의 반대가 우연성이라는 직관이 여기에 반영되는 것이다.



(2) 진짜 들어가기 전에: 영화, 가능세계를 비추는 창

우리 인식의 한계는 우리의 세계를 한계 짓지만, 예술은 우리의 인식 너머에 있는 또 다른 현실의 단상을 지시한다. 종합예술로서 영화는 현실세계에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경험을 가져다주는데, 특히 영상 매체로서 하나의 대안적인 세계를 지시한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가령 <타이타닉>은 당시 침몰하던 타이타닉 호에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하는 젊은 두 남녀가 있는 대안적 세계를 그려 난다. 마블 시네마 유니버스는 “만약 인피니스톤이 우주에 존재한다면...”과 같은 조건문적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경험 한계를 넘어서는 가능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는 일종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 가능성은 우리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기도, 삶의 반성을 요청하기도, 또는 감정적 동조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영화의 난이도’는 그 영화가 제시하는 가능세계가 관객의 현실세계와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달라진다. 삶이 힘든 사람에게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나 <맨체스터 바이 더 씨>와 같은 영화가 매우 쉬울 것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높은 수준의 영화’로 느껴질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제시하는 가능성은 특정 정도의 현실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반-현실성을 그려내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이러한 영화적 가능성을 성립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은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가 우리 현실세계와는 다르지만 동시에 너무 동떨어지지 않은 최근접 세계(the nearliest world)를 그려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 한 영화가 지적 생명체가 살지 않는 250억 광년 떨어진 어느 행성을 그려낸다면 영화적 교훈은커녕 영화관에 상영조차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최근접 세계는 이야기의 무대인 동시에 관객의 경험적 동조를 이끌어 내어야 한다.



(3)  들어간 후에: 왜 그녀는 죽지 않았을까?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현실세계의 1969년 할리우드를 충실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영화적 최근접 세계로서의 조건을 충족한다. 영화를 이끌어 가는 주요 플롯은 샤론 테이트(마고 로비)가 맨슨 패밀리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인데, 결말에 가서 이 소재는 일종의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샤론 테이트가 죽지 않기 때문이다. 타란티노 영화에 익숙지 않다면 여기에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영화는 마치 실제 1969년 할리우드를 재현하는 것처럼 진행되다가 갑자기 마지막에 이러한 관객의 기대를 배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이야기의 관습적 전개를 전복시키는 것에 능한 감독이며,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본 적이 있다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샤론 테이트의 생존은 영화 속의 세계가 단지 최근접 세계, 그러니까 현실성이 있는 여러 가능세계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자명한 사실을 일깨워 줄 뿐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이 영화의 의의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점은 이 영화가 왜 역사의 충실한 반복이 아닌 흥미로운 변주를 선택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다소 대담하게도, 나는 이 영화가 단 하나의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으로 요약된다고 생각한다. "영화 속 샤론 테이트는 왜 살해당하지 않았는가?"


누군가가 살해당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며, 샤론 테이트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이 진정 비극인 까닭은 소위 ‘비운의 여배우’ 따위의 표현으로 치장되어버렸다는 것에 있다. 게다가, 당시는 황금처럼 빛나던 1969년의 할리우드이다. 유망한 젊은 여배우의 충격적인 죽음은 할리우드를 더욱 빛나게 해 줄 가십거리이자 일종의 이벤트이다. 개인에 대한 추모보다는 그 시절의 낭만으로 둔갑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인식은 그녀의 죽음을 필수 불가결한 사건으로 인지해버린다. 알렉산더 대왕이 진정한 대왕으로 남기 위해 그는 일찍 죽을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의미에서 샤론 테이트는 살해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엽기적인 죽음을 당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란티노는 바로 이 부분을 파고든다. 그녀의 죽음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해 타란티노가 그려내는 최근접 세계에서 샤론 테이트는 죽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영화에서 샤론이 죽지 않은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실제 그녀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을, 그러니까 그 살해 사건의 양상성이 우연적임을 폭로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죽음에 어떠한 낭만적 치장도 부적절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화관에 들려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는 샤론 테이트의 모습은 흥미롭다. 이는 마치 스크린 안의 그녀(포장된 이미지의 샤론 테이트)와 스크린 밖의 그녀(한 개인으로서의 샤론 테이트)가 분리되어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 같은데,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는 관객의 표정을 다시 바라보는 샤론의 시선과 표정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더 들어간 후에: 그렇다면 누구에 대한 추모인가?

앞서 지적했듯이 샤론 테이트는 일종의 맥거핀이며, 따라서 이 영화가 노리는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할리우드라는 빛나는 간판 뒤에 숨겨진 자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중년의 두 남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릭 달튼(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은 한물간 배우이고, 이런 그의 스턴트맨인 클리프 부스(브래드 피트)는 일이 없다. 그 둘은 오랜 시간 함께해온 동료이자 친구이다. 그리고 그 둘은 오랫동안 할리우드에 종사해왔지만 1969년의 할리우드는 이들을 외면한다. 촬영 쉬는 시간에 릭이 화를 내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뭉클하지만 그만큼 할리우드가 살벌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처럼 릭은 점점 배우로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그의 그림자인 클리프는 릭의 운전기사로 전락해버린다.


영화의 가능세계가 최근접 세계임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이들의 이야기는 우연적인 사건들의 집합이기보다는 하나의 가능한 사연들의 종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가능하다는 의미는 현실세계에서 있음 직한 일이라는 것으로, 결국 릭과 클리프의 이야기는 현실세계로, 그러니까 할리우드라는 실제 영화적 현장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이러한 현실 반성의 메커니즘은 영화에서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과도하게 신화화된 샤론 페이트의 죽음을 영화적 가능세계에서 다시 써내는 시도를 통해 관객의 초점을 릭과 클리프에게로 옮기는 것에 있다. 이른바 ‘전이된 비극을 통한 관심 촉구’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타란티노가 정말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다른 것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우리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읽어내는 데에 있어서 그때 그 시절의 찬란했던 할리우드를 그려내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딱히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는 영화의 절반만 읽어내는 것이다. 어쩌면 타란티노는 영화적 최근접 세계에서도 빛나던 그 시절의 할리우드를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것으로 현실세계의 1969년 할리우드의 영광에 일종의 양상적 힘을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양상적 힘이 겨냥하는 것, 즉 운명이나 숙명과도 같이 인간의 의지로 피할 수 없는 어떤 강력한 힘의 방향은 단지 영화적 배경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양상적 힘은 오히려 스튜디오 뒤편에 집중되어 있다. 촬영 쉬는 시간에 건방을 떠는 브루스 리와 이를 비웃는 클리프 부스와의 짧은 갈등은 역사적 사실이나 타란티노의 상상력과는 별도로 이 영화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릭 달튼이 어린 아역배우 곁에서 눈물을 쏟는 장면은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지 않는 이야기, 촬영 시간 사이에 있는 이야기를 이 영화는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스튜디오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이야기가 핵심인 것이다.


영화 마지막에 샤론 페이트의 죽음은 클리프의 다리 부상으로 대체된다. 반면 릭은 살아남은 샤론 페이트의 목소리에 이끌려 윗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둘은 서로 멀어지는데, 관객이라면 누구나 다리를 다친 클리프는 더 이상 스턴트맨 일을 할 수 없을 것이지만 릭은 재기에 성공할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이로서 영화는 할리우드로부터 진정 외면받는 이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한다. 그것은 바로 히피의 말처럼 가짜가 아닌 진짜로 무언가를 하는 스턴트맨, 더 나아가 영화 산업 전반에 걸쳐 이름도 없이 삶을 헌신하는 영화인들이다. 샤론 페이트의 죽음은 당시 1969년 할리우드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사건에 불과할 뿐 대중적 인식에서 그 이상은 없다. 전이된 비극은 당시 할리우드에 이름 없이 종사하던 이들에게 부여된다. 즉, 이 영화의 결말은 그 시절의 할리우드에서 클리프처럼 이름도 없이 사라져 버린 수많은 영화인들의 퇴장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렇게 타란티노는 애잔함의 정서가 우리의 최근접 세계에서, 그리고 아주 친숙한 가능성이라는 양상적 힘과 함께 예의 바른 추모를 시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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