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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Jun 16. 2023

꽃피는 봄이 오면

꿈이 사라지고 나서

중학교 국사 시간이었다. 평소에 괴짜스럽기로 소문난 국사 선생님은 갑자기 칠판에다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큰 동그라미를 그리더니 옆으로 이동하면서 점점 작아지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마지막 동그라미는 거의 점에 가까웠다. 국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게 뭔지 아니? 바로 너네들의 꿈이다. 지금은 너네들 모두가 이렇게 큰 꿈이 있지만 나이가 들수록 꿈은 점점 작아 이 점처럼 없어질 것이다.” 당시 나는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거창한 꿈을 가지고 있었기에 꿈이 아주 작은 점처럼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나이가 들다 보니 예전의 나를 지탱해 온 꿈이 없어진다는 것이 점점 구체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억울함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내 처지가 특별한 불행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한 일반적인 과정임을 깨닫고 나니 어느 정도는 편안해지며 그럭저럭 적응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는 의문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남은 내 인생은 어떻게 살아가라는 말인가? 이제는 꿈도 없는데…”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은 꿈을 포기/실패한 이후의 인생에 대해 나름 진정성 있는 태도로 접근한다. 주인공 현우(최민식)는 자기 인생을 휘감는 중요한 목표가 있다. 음악이다. 그는 유명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어 트럼펫 연주를 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의 실력은 그의 꿈을 따라가지 못한다. 매번 오디션에 탈락하고, 여자친구(김호정)까지 놓친다. 여전히 현실을 인정 못하고 꿈도 포기 못하는 현우에게 남아있는 것은 자존심, 일종의 아집이다. 음악 학원을 무시하고, 자기 곡을 카바레에 연주했다고 친한 친구에게 천박하다 비난한다. 정작 본인은 늙은 엄마(윤여정)에 얹혀 살아가는 천덕꾸러기인데도 말이다.


일단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슬픈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상에서 아주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의미 있는 물음은 그 이후에 대한 것이다.


결국 현우는 마지막 오디션 낙방을 끝으로 꿈을 포기한다. 남은 것은 낡은 똥차와 초라한 자존심. 이제 그는 자신의 오랜 꿈으로부터 도망치듯 강원도 삼척으로 간다. 도계중학교 관악부로 임시 교사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도계는 꿈을 포기한 현우에게 일종의 유배지와도 같다. 맛없는 커피와 열악한 환경. 무엇보다도 돈을 벌기 위해 애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뼈아프다. 마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징벌과도 같다. 


하지만 현우는 도계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을 알게 된다. 전국대회 우승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이룰 수 없을 시에 저들은 현우 자신처럼 음악을 그만두어야 한다. 비로소 현우는 자기 자신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타인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는 연주는 입이 아닌 귀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서로가 서로의 소리를 들어야만 전체적으로 어울리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약국을 가야만 했던 현우는 분명 자신도 모르는 어딘가가 많이 아팠을 것이다.


이 말은 상징적이다. 공교롭게도 이제 입을 다무는 자는 현우다. 과거 친한 친구에게 천박하다고 소리치고, 늙은 엄마에게 짜증을 내었던,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사로잡혀 남들을 힘들게 하였던 바로 그 입을 현우는 다물기 시작한다. 대신 귀를 열어 학생들이 하는 말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재밌는 인물은 용석(김동영)이다. 현우는 용석에게 음악은 폼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꾸짖는데, 그 말은 자기 지시적으로 들린다. 재일(이재응)과의 관계도 그러하다. 그는 현우처럼 트럼펫을 불고, 또 현우와 비슷하게 늙은 할머니(김영옥)와 산다. 그리고 약국에서 일하는 수연(장신영)과의 관계는 떠나간 여자친구에 대응한다. 꿈이 사라지고 현우가 도달한 도계는 자기 투영 이미지로 가득 찬 공간이다.


비로소 현우는 오랜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정말로 어느 유명 악단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는 처음 트럼펫을 불었을까? 무엇을 바라고 음악을 하면 안 된다는 그의 말은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자기 모습을 어루어 만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시금 고개를 드는 비참함. 엄마에게 울먹이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술주정을 해본다. 그러자 엄마는 지금이 시작이며 “다시”는 옳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 꿈이 끝난 것이지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매일매일이 처음인 우리에게 ‘다시’는 유효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꿈이 없어진 그 이후에도 현우가 여전히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우는 언뜻 자기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용석에게 해주는 연애 조언이 그러하고, 재일이 할머니의 병원비를 위해 카바레 연주를 뛰는 그의 모습이 그러하다. 허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그의 모습이 그리 밉지 않다는 것이다. 현우는 꿈을 포기한 이후에야 소중한 것이 여럿 남아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얼마 되지도 않는 푼돈을 엄마에게 억지로 쥐어 준다. 첫 월급을 받은 엄마는 마냥 기분이 좋다고 한다. 


영화에서 명시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 도계중학교 관악부는 결국 전국대회에 우승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뒤에 나오는 현우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다. 왜냐하면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잘 안 풀리는 그의 인생을 새로이 시작할 이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단순하게도, 그것은 ‘그냥’이다. 음악은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이다. 카네기홀 같은 곳에서 고상한 방식으로 하지 않더라도, 그냥 탄광 입구 같은 곳에 할 수 있어도 충분하다. 그냥 음악을 할 수만 있고 간간히 끼니를 때울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그리 나쁘지 않다.


꿈은 실패와 성공의 이분법에 지배받으나 인생은 그 너머로 광활하게 깔려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꿈이 산산조각 나면 분명 겨울이 찾아온다. 하지만 모두가 다 알듯이 찾아온 겨울은 지나가는 법이다. 그리고 겨울이 사라진 곳에 꽃피는 봄이 온다. 잊지 말자. 꿈이 실패해도 인생까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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