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mKlaus Jan 05. 2022

<스파이더맨 3: 노 웨이 홈>

두 개의 삶과 그 간극

“나는 아이언맨이다.” 2008년 개봉한 <아이언맨>의 이 마지막 대사는 그 자체로 기존 히어로 영화의 오랜 클리셰를 뒤엎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배트맨이나 슈퍼맨과 같은 기존의 영웅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려 든다. 슈트나 안경 따위를 경계로 이들에게 자경단으로서의 삶과 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분리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의 육체로 두 개의 삶을 살려고 하다 보니 영웅은 늘 괴로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배트맨이 하비를 구할 것인지 레이첼을 구할 것인지를 두고 벌인 조커의 게임은 두 개의 삶의 대립으로 인한 영웅의 고뇌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언맨>은 이러한 클리셰 혹은 설정을 비웃기라도 한 듯 ‘아이언맨=토니 스타크’라는 자기 동일성을 쿨하게 고백한다. 영웅과 인간 사이에는 절대로 매워질 수 없는 어떤 간극이 있다는 점을 인정치 않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이언맨>을 기점으로 마블 시네마 유니버스에는 이 자기 동일성 등식이 공공연하다. 캡틴 아메리카=스티브 로저스, 천둥의 신=토르 오딘슨, 헐크=브루스 배너, 블랙 위도우=나타샤 로마노프, 호크아이=클린트 바튼, 소서러 슈프림=스티브 스트레인지 등등. 마블이 선보이는 이 영웅들은 두 개의 삶에서 고뇌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들은 농담을 치고, 동료 영웅들 사이에서 갈등하고, 막강한 악당에 맞서 서로 협력하고, 또 실패에 좌절하기도 한다. 


"I am Ironman" 이 대사는 지난 마블 영화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무게감을 뺀 마블 영화의 서사가 내세우는 새로운 덕목은 ‘쿨함’이다. 이 전략이 효과적이었다는 증거는 마블 영화가 전 세계 영화판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그 결과 2008년 <아이언맨>을 기점으로 영웅은 ‘아이돌’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고결함, 비범함, 대업, 비장함, 고뇌, 희생, 여정 등은 여전히 마블 영화에 내재하는 요소이지만, 우리는 아이언맨의 슈트, 토르의 묠니르, 캡틴의 방패, 그리고 가디언 오브 갤럭시의 실없는 농담에 더 열광한다. 마블 영웅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여기 이러한 대사가 있다. “나 같으면 토르랑 자고, 아이언맨이랑 결혼하고, 헐크를 죽일래.” 즉, 히어로는 하나의 패션이 되어버린 것이다. 뭐, 쿨함이 시대를 대변하는 가치가 되어버린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스콜세지의 우려처럼 ‘시네마’가 ‘테마파크’로 대체되는 현실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하지만 방금 언급한 대사 다음에는 이러한 대사가 뒤따른다. “스파이더맨은?” “걘 그냥 스파이더맨이잖아.” 


쉽게 말해 스파이더맨은 잠자리, 결혼, 그리고 죽일 대상조차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이라는 말일까? 이미 세 시리즈가 개봉했지만 공통적인 설정은 스파이더맨은 자신이 피터 파커라는 사실을 숨기려 든다는 것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자경단 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피터 파커의 삶을 챙기기에는 그는 너무 평범하기 때문이다. 피터 파커는 브루스 웨인이나 토니 스타크의 재력도, 토르나 원더우먼과 같은 고귀한 혈통도 없다. 그렇다고 헐크나 슈퍼맨처럼 엄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는 그냥 스파이더맨, 토니 스타크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동자 계급의 히어로’인 것이다. 여기서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 사이의 긴장이 생긴다. 악당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는 정의감과 내 몸 하나도 간수하기 어렵다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스파이더맨을 고뇌하게 한다. 여기서 그 간극은 피터 파커 특유의 쿨하지 않음, 그러니까 ‘찐따미’로 심각한 내용이 되어버린다. 사실 그 고뇌의 내용이 사실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다. 고작해야 여자애랑 잘 되었으면 하는데 닉 퓨리(새뮤엘 잭슨)가 자꾸 귀찮게 하는 그런 정도이다. 피터의 평범한 여건과 찐따스러운 심성은 이처럼 두 개의 삶을 끊임없이 대립시켜 스파이더맨 서사를 주되게 끌고 가는 것이다.


영화 초반은 그 제목의 의의를 분명히 하며, 특히 10대 소년의 현실적인 반응을 잘 그려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기존 히어로 영화의 클리셰, 즉 두 개의 삶의 대립을 정면으로 다룬다. 영화는 <파 프롬 홈>의 충격적인 엔딩에서 시작한다. 스파이더맨의 익명성은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의 폭로를 통해 무너져 내린다. 영화는 초반부터 <노 웨이 홈>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분명히 한다. 집 주변으로 헬기가 뜨고, 창문으로는 벽돌이 날아오고, 주변인들이 취조를 받는다. 결국 피터(톰 홀랜드)와 메이 큰엄마(마리사 토메이)는 원래의 집으로부터 나와 해피(존 파브로)의 집에 머무르게 되는데, 더 이상 원래 집으로 돌아갈 길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자기를 포함한 친구들까지 대학에 떨어지자 피터는 크게 낙심한다. 그리고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비치)를 찾아간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두 개의 삶을 사려는 피터의 태도가 진짜 문제라고 명확하게 지적한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적으로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사실 이 문제는 이미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2>에서 동일하게 다루어진 적이 있다. 하지만 존 왓츠가 그리는 피터는 이전 시리즈의 피터들과 비교할 때 좀 답답할 정도로 미성숙하다. 가령 <홈 커밍>에서 토니가 하지 말라는 짓을 한다던가 <파 프롬 홈>에서 토니 스타크의 유산을 함부로 넘기는 행위가 그러하다. 이러한 설정은 스파이더맨 팬들 입장에서 상당한 불만이었다. 하지만 <노 웨이 홈>은 마치 이번 영화를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듯이 피터의 미성숙함을 적극 활용한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아이언맨과 같은 정신적인 멘토보다는 차라리 각성을 촉구하는 훈계자 역할을 한다.


미성숙한 피터는 두 개의 삶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뇌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양자 모두를 취하고자 한다. 이러한 태도는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 시전 도중에 계속해서 조건을 다는 그의 모습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에게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은 한마디로 어린아이의 투정, 어리광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미성숙하다는 말은 성숙의 여지가 있다는 말과도 같다. 존 왓츠의 스파이더맨 3부작은 바로 이 점을 노리는 듯하다. 마법 시전 실패 이후에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입학 담당자에게 전화조차 걸어보지도 않았다는 타박을 받고 쫓겨난다. 그리고 설득을 위해 직접 입학 담당자를 찾아 나서는데, 짧은 시간이나마 피터는 자기 일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배운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불러들인 여러 악당을 처리하는 일도 그러하다. 물론 닥터 스트레인지의 요청이 있기는 하였지만, 피터는 친구들과 함께 주도적으로 자신이 벌인 일을 수습하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스파이더맨의 중심적인 명제,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와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전 시리즈들과 비교할 때, 이번 시리즈는 두 개의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까닭을 피터의 미성숙함에 귀속시킴으로써 서사에서 성장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즉, “어른이 된다는 것은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앞서의 명제와 병치되는 것이다.


모든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자라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외적 요인들이 분노로 가득 찬 어른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크고 작은 위기에도 피터는 결코 삐뚤어지지 않는다. 이번 영화는 특이하게도 악당을 처벌하기보다는 ‘갱생시키는’ 새로운 개념의 영웅상을 보여준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멀티버스의 관점에서 악당들의 죽음이 더 이득이라고 피터를 설득하나, 그는 듣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터에게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만 한다는 소박한 도덕적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메이와 깊이 연관되는데, 이번 영화에서 그녀는 피터에게 ‘책임’에 대응하는 스파이더맨의 당위를 설파해준다. 메이는 피터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정언명령’과도 같다. 게다가, 그녀는 피터에게 남겨진 유일한 가족임을 고려한다면, 피터 파커로서의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따라서 <노 웨이 홈>에서 그녀의 죽음은 둘 중 하나의 삶을 선택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제시하기보다는 두 개의 삶 모두를 포기하는 절망에 더 가깝다.


닥터 스트레인지 대 스파이더맨의 대결은 짧지만 강렬하며, 특히 미러 디멘젼 이후의 전투는 상당히 매혹적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2>가 다시금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는 전혀 엉뚱한, 혹은 스포일러를 통해 어느 정도 예상된 방법으로 위기 극복을 제시한다. 두 명의 선배 스파이더맨은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피터를 위로하고,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삶에 복귀하도록 한다. 사실 이 부분은 매우 짧고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처음 보는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각자의 개인사를 고백하더니 이내 피터의 기분이 나아진다는 전개는 어딘가 허술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전제는 저들이 피터와 동일한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이다. 피터는 스파이더 센서로 쉽게 스파이더맨으로서의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따라서 저들의 고백에 남다른 공감과 위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두 명의 스파이더맨은 피터의 거울 이미지인 동시에, 성장 서사의 종착점이 어디인지를 나타낸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이다. 피터는 토니 스타크에 크게 의존하였다. 심지어 토니의 죽음 이후에도 피터는 여전히 그가 만든 슈트를 입고 그가 남긴 유산(이디스 안경과 페브리케이터)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자기와 동일한 두 스파이더맨을 만나면서, 그러니까 자기 자신과 대면하면서 독립적인 한 영웅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전투에서 피터가 다른 두 피터를 지휘하는 모습은 오직 그만이 팀플레이를 해보았다는 설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장을 통해 이제 그가 누군가의 지휘를 할 역량을 소유했다는 성장의 징표인 것이다.


마지막 그린 고블린(윌렘 대포)과의 대결에서 피터(톰 홀랜드)는 '이 정도로 진지한 배우였는가?'라는 감탄을 선사하다.


두 스파이더맨을 통해 그의 스파이더맨으로서의 삶은 복구되었지만, 피터 파커로서의 삶은 그렇지 못하였다. 모두 같은 피터 파커라도 할지라도 각자의 삶까지 동일하지는 않으니 말이다. 메이의 죽음과 주변인들의 망각은 피터가 치르기에 너무나도 큰 대가로 보인다. 마지막에 피터는 다시 MJ(젠다야 콜먼)를 찾아간다. 하지만 이마에 난 상처를 보고는 그간 연습한 연설 쪽지를 도로 집어넣는다. 이는 피터가 이전의 피터 파커로서 돌아갈 생각을 과감히 포기한다는 결단이기도 하다. 이러한 피터의 결단은 그 자체로 성장의 증거인 동시에, 두 개의 삶을 사려는 의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그것은 용기다. 마지막 전투에서 피터는 글라이더로 그린 고블린(윌렘 대포)을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렇지 않았고 원래의 신념대로 혈청 주사를 통해 갱생시킨다. 사사로운 감정 대신 본래의 신념을 앞세우는 일에는 반드시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는 대신 멀리서 지켜주기로 결정한 것에는 더 큰 용기가 요구된다. 


이제 피터에게 고단한 스파이더맨 업무를 마치고 돌아갈 집은 없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이전의 집이다. 그에게는 새로운 집이 생겼기 때문이다. 과거 샘 레이미 3부작에 나올 법한 그러한 낡고 허술한 집이다. 피터는 여기서 두 개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 그는 이제 혼자서 슈트를 만들어 입고,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사랑하는 애인도 친구도 그에게는 없다. 다만 이전에 우리가 알던 스파이더맨처럼 뉴욕 경찰의 무전을 들으며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 뉴욕 시내를 활공할 뿐이다. 이전 시리즈에서처럼 피터의 삶은 앞으로도 계속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픔을 가면 뒤로 남긴 채 다시 한번 두 개의 삶을 살아보려 한다. 이제야 피터는 큰 힘에 따른 큰 책임을 질 자세를 배운 진정한 스파이더맨이 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더욱 피터의 앞날을 응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돈 룩 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