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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Klaus Feb 02. 2022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연인의 얼굴


보는 것 만으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내면의 심연이 있는데, 이를 꿰뚫어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이해는 단지 묘사에 불과할 뿐이다. 처음에 마리안느(노에미 멜랑)가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를 그리기에 실패한 까닭은 단지 엘로이즈의 순간적인 모습만을 종합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은 보이는 것 이상이다. 단지 얼굴의 윤곽선, 눈, 코, 입, 그리고 귀 등을 그린다고 그 사람의 얼굴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얼굴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소위 표정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신경계가 흥분함에 따라 특정 얼굴 근육은 미세하게 움직이고 떨리는데, 때로 이는 너무 미묘해서 상당한 집중력과 관찰력이 아니라면 포착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마도) 초상화는 그리기 어렵다. 어떤 미묘한 표정에 숨겨진 의식적 활동이나 감정이 무엇인지, 그 마음이라는 것을 읽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란 어렵다.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얼굴의 안과 밖을 모두 아울러 그리는 것이다.


첫 번째 초상화에 실패한 마리안느는 진실되게 엘로이즈에게 다가간다. 자신은 사실 화가이며, 당신을 그리고자 한다고 고백한다. 다행히도 엘로이즈는 그리 놀라지 않으며 포즈를 잡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제 마리안느는 더 이상 엘로이즈를 몰래 관찰하고 기억에 의존하여 그녀를 그리지 않아도 된다. 얼굴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은유이자 전부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세계를 알아간다. 그녀의 인생사와 현재의 감정, 그리고 근심을 알게 된다. 어떤 생각과 감정에서 그녀의 얼굴은 어떻게 변하고, 자세는 또 어떻게 변하는지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초상화는 엘로이즈에 더 가까워진다. 하지만 이 영화의 놀라움은 여기서 시작한다. 


마리안느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는 것도 이 영화의 재미난 부분이다.


내가 너를 본다는 것에 우리는 오직 나만이 너를 본다고 잘못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너를 볼 수 있다면, 너도 나를 볼 수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을까? 영화는 화가-모델의 역학관계에서 시선의 비대칭성을 전복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얼굴에 탐닉했던 만큼 사실 엘로이즈도 마리안느의 얼굴을 탐닉했던 것이다. 모닥불 주변에서 치맛자락에 불이 붙은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마리안느와 그러한 그녀를 바라보는 엘로이즈. 이제 시선의 대칭성은 철저하게 둘 사이의 관계에서 핵심이 된다. 화가-모델, 고용주-피고용주, 귀족-평민, 인생의 경험자-무경험자 등. 영화에서 상하 구조의 대립항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여성-여성의 동질성으로 묶인,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동등하게 공유하는 그런 평등한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바꾸어 말해 사랑말이다.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인 단 한 장면. 대칭적인 시선 가운데 타오르는 한 여인.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누가 누구를 좋아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속삭임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연인에게 더 소중할 뿐이다. 하지만 사랑을 속삭이는 그 순간순간은 매우 중요한데, 사랑에는 대개 유효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많은 경우에서 파국이 예정되지 않은 사랑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들의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치맛자락에 붙은 불은 결국 하얀 재만을 남기고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리안느는 환상을 본다. 하얀 옷을 입은 엘로이즈가 자꾸만 그녀 앞에 나타난다. 비현실적인 명암. 무심한 표정. 창백한 얼굴. 이 유령의 이미지에서 두 연인의 종말은 예고되어 있다. 


영화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이용한다. 이 이야기는 언제나 물음표로 끝난다. 왜 마지막에 이르러서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본 것일까? 에우리디케를 믿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싶었던 것일까? 여하튼, 이 신화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에게 반복된다. 집을 나서는 순간 마리안느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유령과도 같은 하얀 옷의 엘로이즈를 본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난다. 만약 마지막에 그녀가 뒤를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마리안느가 어디 엘로이즈와 사랑의 도피라도 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영화는 사랑을 어떤 물리적 관계로 한정 짓지 않는다. 서로 만나지 못하더라도, 기억만으로도 유지되는 그런 사랑도 있다고 말한다.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집을 나설 때 마리안느는 뒤를 돌아보았으면 안 되었다.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그녀는 그 집에 아쉬움을 두고 왔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사랑은 작은 그림 하나로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고, 슬픔은 영원한 저주로 그녀에게 남게 되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는 오르페우스가 아닌 에우리디케를 떠나보내는 오르페우스를 그렸다.


오르페우스 신화는 반복되는 동시에 전복된다. 마리안느와 달리, 엘로이즈는 끝내 마리안느를 보지 않았다. 터져 나오는 슬픔을 억누르면서, 그렇게 그녀는 마지막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지켜내는 것에 성공한다. 추억 속에 온전히 박제된 마리안느 그대로의 모습을 말이다.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는 낙서처럼 그려진 작은 그림이다. 그녀는 마리안느가 그리울 때마다 책의 28페이지를 펼친다. 이렇게 그녀는 사랑을 기억하고, 아주 오랫동안 마리안느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오르페우스를 생각해보자. 어쩌면, 아주 어쩌면 오르페우스는 그나마 행복한 것은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최소한 그는 순간이나마 죽은 에우리디케를 다시 한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끝까지 고개를 돌리지 않은 것에 엘로이즈는 정말 후회하지 않았을까?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의 초상화에 다시 사로잡혔던 것처럼, 연인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치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녀는 마리안느를 28페이지 속에 영원히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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