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배는 만들기 쉽다. 그래서 문제지만, 그래서 다행이다.
성공에 욕심 낼 자신이 없으면, 하고싶은 거라도 있든가. 하고싶은 게 없으면 성실하기나 하든가. 스물 네 살의 나는 치열하지 못했기에 떳떳하지 못했고, 떳떳하지 못하니 자신 있게 스스로를 팔 수 없었다.
지금의 취업도 말할 것 없이 극악의 난이도지만, 2010년대 중반에 이미 취업이란 학벌로만 비벼서 어떻게 쉽게 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동아리로는 모자라 한창 '학회'라는 것이 유행했고, 아르바이트로는 모자라 기업 인턴 경력을 본격적으로 요구 받기 시작한 시기로 기억한다. 취업스터디는 안 하는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었고, 취업 3수생, 4수생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공들여 만든 화려한 전투함들 사이에서 '나이가 차서' 시장에 밀려나온 조악한 종이배가 쉽게 팔릴 리가 있나. 심지어 그 종이배 스스로가 하늘을 우러러 온통 부끄럼에 가득했다면?
어렸을 때는 과도한 자기 확신이 오히려 문제였다. 세상에서 내가 나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고,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정의 내리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다소 재수없는 애였다. 나를 아는 모든 주변 사람들이 너는 취업, 면접 걱정은 없겠다고 할 만큼 오만상 당당하고 똑똑한 척은 다 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취업 한 이후가 걱정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취업을 준비할 당시의 나는 완전히 길을 잃은 상태였다. 매일매일 자소서를 쓰는 시간은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고문 시간이었다. 뭐하고 살았지, 돌아보면 자괴감이 몰려왔다. 무기력을 핑계로 게으르게 방황한 대학생활 4년의 대가를 절절히 치뤘다. 없는 경력과 의지와 열정을 쥐어짜서 과대포장 하고 있으면 그 자괴감은 배가 되었다. 그렇게 알맹이 없는 자소서로 서류심사에 떨어지면, (역시) 거절당했다는 수치심과 다시 또 고문실로 돌아가서 초면인 사람에게 나에 대해 개소리를 늘어놓는 글을 써야 된다는 괴로움이 차올랐다. 그러나 가장 괴로운 부분은 나 스스로도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 스스로의 한심함이었고, 가장 싫은 것은 그 와중에도 정말 되고 싶은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무기력한 나였다.
어쩌다 허술한 서류심사를 통과해서 면접까지 가도 순탄치 않았다. 팔아야 하는 제품에 하자가 있다는 사실에 변함이 없는데, 글로도 모호했던 광고문구가 말로 한다고 갑자기 살아날 리는 없다. 건강식품을 팔면서 "전반적으로 대충 몸에 좋을 것 같은데요, 좀 사주시겠어요?" 하고 홍보하는 꼴이었다. (사겠냐고)
고객에 대한 분석도 안일했다. 남들만큼 간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 간절함은 취준을 끝내고 싶은 간절함이자 취업이 '되고' 싶은 간절함이지, 내 직업을 구하고자 하는 간절함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사의 핵심가치가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 면접관의 질문에 고작 세 단어 내뱉지 못해서 한심하게 얼을 탔다. 분명히 면접실에 들어가기 20분 전까지 붙잡고 있었던 프린트물에 크게 적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3페이지 하단에 큼지막한 피라미드 모서리마다 촌스러운 글씨체로 두 글자 짜리 단어들이 적혀 있었다는 이미지만 눈 앞에서 둥둥 떠다녔다. 내가 생각해도 납득이 가는 탈락들이 이어졌다.
문제는 납득이 가는 탈락이라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첫 번째 취준 시즌 종료를 알리는 마지막 불합격 통보를 받은 날, 지방에 계신 부모님이 걱정하실 걸 알면서도 전화기를 붙들고 멍청한 자기연민을 토해냈다. "세상 아무도 내가 필요 없대" 하고 엉엉 울었다. 당연하다. 인생에서 가장 짧은 기간동안 가장 많은 거절을 당했다. '당할 만했는지'가 맞은 사람한테 뭐가 중요한가. 처음부터 자기불신으로 시작했다지만, 열심히 얻어터지면서 스스로에 대해서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동안 자기혐오는 더 커졌던 것 같다.
두 번째 취준 시즌에는 그나마 가졌던 취향이나 반찬 투정도 때려치웠다. 업종이나 회사의 평판보다는, 최대한 간단한 자소서 항목만 요구하는 모집공고를 찾아다녔다. 나도 잘 모르는 보잘 것 없는 나에 대한 개소리는 구체적이고 길어질수록 더 큰 자괴감을 불러왔기에. 자신과 함께 일할 사람을 뽑으면서 제대로 된 질문도 던지지 않는 회사가 얼마나 괜찮은 회사일 것인가 따위를 사유할 만큼 여유가 있지 못했다. 심정적으로는 이미 낭떠러지 끝이었다.
그러나 시작부터 결과는 더 좋지 않았다. 한 번의 취준 실패 끝에는 인적성시험 점수도 개판이 되었기 때문이다. 적성검사 보다도 인성검사가 문제였다. 적성검사는 기술이지만, 인성검사는 자기확신이 필요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알 수 없게 되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대답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진실성 점수가 엉망으로 나왔다. 그 당시, 출석만 하면 무조건 합격한다고 취준생 사이에서 유명했던 H중공업의 인적성 시험에서까지 떨어졌을 때는 '와 나 진짜 갈 때까지 갔나보다' 하고 앞이 깜깜했다.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애증과 불신의 폭풍의 언덕 꼭대기에서 한 회사의 입사공고를 마주했다. 자소서 항목은 평범하기 그지없었고, 항목당 500자 이상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1년 간 쌓아온 백데이터에서 열심히 짜깁기 해서 1시간 이내로 작성 가능했다. 심지어 인적성시험은 없었다! (그 때의 인사팀장님께 참으로 감사드린다) 모집공고 이전에는 24년 짧은 인생에서 이 회사의 이름을 마주한 적도 없었지만, 그런 것은 그 당시의 내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회사가 정말 뭐 하는 회사인지는 1차 면접 전날에서야 알았다. 막상 알아보다 보니 너무 모르는 분야라 당황스러웠고, 그렇게 새벽 네 시까지 필사적인 구글링으로 몇 개 없는 기사를 찾아보다가 늦잠을 자는 바람에 심지어 면접에 지각까지 했다. 면접장에서는 너무 떨어서 말도 제대로 뱉지 못했고, 보다 못한 면접관님이 뜯지 않은 본인 앞의 생수병을 건네주기까지 했다. '아 이게 말하자면 면접 기념품이 되겠구나, 백프로 떨어지겠구나' 했는데, 붙었다.
그 합격 소식에 너무 황당해서 긴장이 탁 풀리더니, 2차 면접은 술술 풀렸다. 천운이었다. (회사 관계자 분들께서 이 글을 발견하지 못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격한 걸 보면 우린 정말 운명이라고 우기고 싶다.) 빠르게 받은 합격 소식과 함께 나는 얼른 셔터를 내려버렸다. 취뽀 기념 제주도 여행 중에 싸트 합격을 알리는 전화가 울렸지만 '어쩌라고' 하고 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가장 친한 친구 두 명과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박진영의 어머님이 누구니를 떼창하면서 엉덩이를 씰룩이느라 바빴다.
나는 여느 경영학도들이 그렇듯 광고회사, 컨설팅회사, B2C 소비재 마케팅 기획을 한번쯤 가볍게 꿈꿨고,
그렇게 평생 내 돈으로 직접 구매할 일은 절대 없을 산업용 기자재 제조업체의 기획부서에 입사했다.
지금까지도 함께하고 있는 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