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막. 세상이 넓어지나 했는데요 다시 좁아졌습니다

종이배, 표류의 시작

by A Study in Scarlet

살면서 처음으로 '인생에는 다양한 시기에 예측하지 못한 다양한 경로가 열릴 수도 있구나'라는 걸 배우게 된 것은 막 스물세 살이 되던 겨울, 유럽에서였다.



내신 시험 한 번, 수능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다 끝나버릴 것 같이 여겨지던 트랙 위의 삶에서 꽤나 상위권 경주마였던 나는, 막상 결승점(사실은 아니지만)을 통과하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방향을 잃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왜 사는지 납득이 가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던 혼란의 시기는 야금야금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갉아먹었고, 나는 거대한 무기력과 우울에 빠졌다.


보다 못 한 엄마의 등쌀에 억지로 교환학생을 신청해 나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나는 겉돌았다. 스물두 살의 나는 모두가 축제 분위기인 2012년의 마지막 날, 빈 시내 어딘가에서 터지는 신년 축하 폭죽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홀로 기숙사에 처박혀 막걸리를 마시면서 엉엉 울었다.(지금 생각하면 막걸리를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신통한 일이다)


전체 인구로 치자면 분명히 평균 이상의 삶이다.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생존의 문제나 대학교 학비를 걱정해야 될 형편은 아니었고, 화목한 가정에서 나름 똘똘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서 지방 동네 또래 사이에서 잘난 편이었다.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는 좋은 결과를 얻는 삶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런 내게 주어진 환경이 나 같은 인간에게는 과분하다고 생각됐다. 오히려 '인과응보'여야 지당한 세상에 나 따위가 감히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게임이라면, 일시정지를 눌러두고, 세이브 파일을 일단 하나 만들어 놓고 정신을 차리고 싶은데, 인생은 멈춰지지가 않으니까. 무력감에 자꾸만 어린애처럼 하릴없이 울었던 것 같다.


교환학생을 가서도 공부와 유흥 어느 쪽 토끼도 못 잡고 돌아올 상황이 되었을 때, 휴학을 결심하고 거기서 조금 더 버텨보자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면 기숙사에서는 쫓겨날 처지였기에, 환경을 전환해 보고자 같은 독어권이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의 독일 베를린으로 이동했다. (독어는 쥐뿔 못하는데, 그때는 거기 살면 좀 하게 되지 않을까 미래의 본인을 과신했다.)



거기서의 시간은 또 달랐다. 대학생이라는 카테고리와 학교라는 소속집단이 잠시 사라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됐다. 독일어 어학원에는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인생의 스테이지에 놓인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직업도, 목적도 전부 제각각이었다. 30대 중반인데 지금까지 직업을 5번 바꿨다는 이탈리아에서 온 전직 웨딩플래너, 광란의 섬 이비자의 호텔에서 일하면서 독일 투숙객이 너무 많아 원정어학연수를 온 호텔 프런트 직원, 목수인 남편과 함께 이민 왔다는 중년의 일본인. 독특한 사연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기숙사를 벗어나 플랫을 셰어 하면서는 다양한 예술계열의 젊은 한국인들 만났다. 한국에서는 사귈 기회가 없는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홀로 유학했다는 바이올린 영재 음대생, 한국에서 대학을 그만두고 현지에서 사진을 전공하려고 스튜디오에 몰래 숨어 살면서 입학시험을 준비 중인 동갑내기, 멀쩡히 대기업을 잘 다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현타를 때려 맞고 자유로운 삶을 살고자 베를린으로 왔다는 막차 워홀러 서른 살 왕언니 등. 세상에 있는 오만가지 다양한 삶의 형태가 입체감 있게 3D로 자각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뭔가, '나에게도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그 어떤 길이 언제 열릴지 모른다'는 기대가 싹튼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런 두근거림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새로운 자극에 잠시 꿈틀 하기는 했지만 무기력은 이미 관성이 되어가고 있어 쉽게 동력을 잃는 전두엽이었다. 생각해 보면 하나의 큰 계기도 있었던 것 같다. 세상 힙한 삶을 살던 자극전도사 왕언니가 언제나와 같이 '인간은 언제든 뭐든 될 수 있어!' 하고 희망찬 말을 떠들던 중이었다. 어쩌다 보니 내가 당시 다니던 대학 이야기가 나왔는데, 대학교 이름이 나오자마자 언제나와 다르게 급 정색을 했다. 그냥 정신 차리고 대학교나 졸업하고 취업 잘하라고 했다. 그리고 분위기는 급 소강상태를 맞았다.


아직도 그 눈빛이 기억이 난다. 시험 망쳤다고 울고 있어서 몇 개 틀렸냐고 했더니 1개라고 대답한 전교 1등을 보는 듯한 눈이었다. 너는 다르다고 선이 그어진 느낌이기도 했다. 아, 나는 안 되는 건가? 그쪽 세계로 갈 수 없는 건가?


그 이후로는 뭔가 그 예술가들 무리와는 서먹해졌고, 결국은 만나지 않게 되었다. 교환학생 때 알게된 일본 친구들의 소개로 만난 고베대학교 유학생들과 놀러다니며 일본어는 무진장 늘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아무런 화학반응도 일으키지 못한 나날이었다. 무언가 열릴 것 같았지만, 그대로 파시식 하고 발화되지 못하고 꺼져버렸다.



귀국했더니 난 졸업반이었고, 취업을 하지 않으면 곧 백수였다.

지도도, 나침반도 없고,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은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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