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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빌리밀리 Oct 22. 2023

가장 큰 위로가 된 친구

고등학교 때 만난 은정이는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학급 번호를 매겼던 시절 교실에서 앞뒤 자리에 앉게 되며 친해졌다. 이은영, 그리고 이은정 우리는 나란히 33번 34번이 되었다. 개그우먼 뺨치게 유머 감각이 있는데다가 체육대회를 하면 언제나 앞에 나서서 응원을 했던 은정이와 친해진 건 학창시절의 훈장과도 같았다. 살면서 은정이만큼 나를 웃겨준 사람은 없었다. 그애 옆에 있으면 나는 배꼽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언제 빠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은정이는 그 정도로 재밌는 아이였다. 은정이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나와 성적이 비슷한 친구와 친하게 지내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놀다보면 성적이 비슷비슷한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그러나 은정이를 만나고 또 은정이의 친구들과 친해지면서 나의 학창시절은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속한 그룹도 두 개로 나뉘었다. 은정이의 그룹과 기존 나의 친구들 그룹. 나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인간으로서 진화 또한 일어났다. 


은정이와 나는 이름도 비슷했지만 종교도 같았다. 천주교를 믿는 은정이와 나는 매주 일요일 청소년 미사에 만나 미사가 끝나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 내내 수다를 떠는 게 모자라 같은 자리에 한 시간을 서서 얘기를 나누다 헤어지곤 했다. 나도 은정이와 단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이라 특별했는데, 사십 중반이 다 되어 은정이도 이 시간은 자기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회상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나는 은정이 그룹과 가장 많이 놀았다. 여행도 가장 많이 다녔고 그 그룹 친구들은 모두 은정이를 중심으로 하나 둘 모인 그룹이라 늘 은정이가 주축이 되었다. 한 번은 강원도 정선 팬션에 친구들 다섯이 놀러갔는데, 우리 그룹에 대학생이 되어 들어온 원희가 잘 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심하게 삐치는 사건이 있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자리에 앉았는데 자기만 홀로 올라가려고 하니 외롭고 속상하고 그런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아이들은 자리를 바꿔주지 않은 것이다. 이런 감정이 폭발했을 때 우리는 적잖이 당황해 했다. 그 때에도 은정이는 바닥 복도에 주저앉으면서 자기가 여기 앉아서 가면 되지 않냐고 했다. 그때 우리 중 은정이의 성격을 따라갈 아이는 이 중에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렇게 은정이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깊숙이 들어가서 이해해주고 그 마음을 풀어주는 아이였다. 


나는 은정이의 친구라는 게 참 자랑스러웠고 좋았다. 강남역에서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지기 아쉬울 때면 도곡동에 있는 은정이의 집은 늘 아지트가 되어줬다. 우리가 맥주병을 딸랑거리며 밤늦게 집에 들어가도 은정이의 어머님은 언제나 환히 우리를 맞아주셨다. 그런데 은정이는 어버이날이면 그런 어머님을 챙기는 대신에 큰이모님을 챙겼다. 그것도 대학생 용돈에서 10만원 상당의 돈을 써가면서.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은정이의 행동이 궁금했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저 집에 돌아와서 엄마를 붙잡고 은정이는 어버이날 이모한테 줄 선물을 사는데 큰 돈을 쓰더라고 정도로 이 일을 마무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의 또 다른 아지트인 양재역 파파이스로 은정이는 고교동창생들을 소집했다. 그 날 은정이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자신이 왜 엄마보다 이모를 챙기는 지에 대해서 털어 놓았다. 대기업 건설사에 다니는 아버지와 은행직원인 엄마가 서울로 상경해 자리를 잡고 일을 하는 동안 자기는 이모네 맡겨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시절 이모와 자란 정 때문에 자신은 부모보다도 이모에게 더 큰 정이 들었고 이 때문에 이모를 더 따르고 챙기게 된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이모는 네 명이나 되는 자신의 친자식들보다 자기와 자기의 오빠를 더 귀애하며 키우셨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은정이는 울었다. 은정이와 이모에 대한 궁금증이 풀렸지만 그렇다고 은정이가 불쌍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부모든 이모든 어린 시절 애착관계를 형성해낼 수 있는 가족이 있었으니까 그걸로 인해 결핍이 생기거나 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랬던 은정이가 조금씩 모임에서 까칠해지기 시작하고 독단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모두 은정이 얘기가 나왔다. 나도 은정이 때문에 힘든 건 마찬가지여서 아이들이 은정이에 대해 험담을 할 때 그런 면이 있다고 정도로 수긍을 했던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은정이는 그 누구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잠수를 타버린 것이다. 한 일주일 아니 한 달을 연락 안하다 짠하고 나타나서 언제 그랬냐는 듯 우리 앞에서 수다를 떨 것 같던 은정이는 일 년의 세월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은정이의 안부가 궁금하던 어느날 은정이한테서 연락이 왔다. 그리고 그동안 실어증과 대인기피가 생겨 은둔 생활을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정신 병원도 다녔다는 이야기를 했다. 의사선생님은 은정이의 이런 증상에 대해 가면우울증이라고 설명했다고 했다. 내향적인 기질인 은정이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해 외향성을 끌어내며 살다가 어느 순간 병으로 터져 나온 거라고 말을 했댄다. 자신이 어려서 이모네 집에 살면서 이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이주일 춤도 추고 웃기는 얘기도 많이 해왔던 것이 심리적인 압박으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이게 대학을 졸업하고 병적으로 터져버린 것이다. 


이 때 내가 받은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누구보다 외향적인 은정이가 극강의 내향이었다니, 인지적 부조화 속에 놓인 나는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은정이를 돕고 싶었다. 마음이 아픈 친구에게 어떻게 해서든 치유라는 도움을 주고 싶었다. 은정이가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건 나한테만 털어놓은 게 아니었다. 친구들 모두가 은정이가 아팠다는 사실을 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뭔가를 더 해줘야한다고나 혹은 특별히 뭔가를 더 참작해줘야 한다거나 하는 것들을 생각지는 못했다. 


몇몇 친구들은 은정이의 중학교 친구기도 하고 중학교 모임 그룹에 은정이와 함께 속해 있기도 했다. 그 안에서 어느 순간 은정이는 문제가 되었다. 아이들이 은정이에 대해 무척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은정이가 모임에 나오지 않은 친구에 대해 했던 얘기들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은정이가 독단적으로 굴었을 때 안 좋은 감정들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은정이가 한 말은 그에게 독이 되어 돌아온 것 같았다. 


이 일로 나는 은정이와 친구들 사이에서 이들을 중재하기 위해 하루에 몇 시간씩 전화 통화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은정이는 지금 아픈 상태라는 걸 강조하며 조금 더 이해해 줄 것을 어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틀어진 마음은 되돌려지지가 않았다. 한 살이라도 어린 시절에 우리가 좀 더 우리 자신한테 당당할 수 있는 선택을 해야 훗날 지금을 돌아보며 그러지 못할 미래에도 위안을 삼지 않겠냐고 해봐도 이 말은 전혀 먹혀 들지가 않았다. 내가 해보려던 조율은 벌어진 틈을 1mm도 좁혀놓지 못한 채 무산됐다.   


그렇게 십 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그러는 동안 은정이는 잠수를 몇 번이나 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카오톡 프로필에 그녀의 사진이 올라올 때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늘 은정이에게 먼저 연락을 했고 그렇게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인연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이어나갔다. 은정이가 없는 친구들과의 모임을 하면서도 나는 그 친구들에게 너희와 상관없이 은정이를 만나겠노라고 오픈을 하고 늘 은정이를 챙겼다. 그렇게 또 7년의 세월이 흘렀다. 간만에 한국에 방문을 해서 누구보다도 은정이를 먼저 만났다. 예전 고등학교 때 모습과 말투 그대로인 은정이를 보니 너무 좋았다. 백화점에 있는 평양 냉면집에서 냉면을 먹고 우린 그간 서로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하느라 냉면 맛도 채 느끼지 못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음식이 맛있다고 연거푸 얘기했다. 맛집을 모르면 백화점에서 아무 곳이나 들어가도 맛은 보장된다며, 백화점은 아무 음식점이나 입점해주는 그런 곳이 아니라며 우리는 필요도 없는 음식점 음식의 맛을 칭찬했다. 그리고 역시나 백화점 내에 있는 커피점에 들렸다. 식후 커피는 20대부터 국롤이었다.  그 자리에서 은정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알고 있는 은정이의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라 새엄마라고. 그렇게 정적이 5초간 흘렀다. 그 정적은 전기 충격을 동반한 듯 찌릿했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은정이의 엄마가 친 엄마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은정이와 외모는 물론 말투까지 너무 닮아 있어서 추호도 그 둘이 혈연이 아닐 거란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자신의 친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했는데 둘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댁 어른들의 강요로 그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빠는 지금의 엄마와 재혼을 했고 아들을 한 명 더 낳았다. 그게 바로 은정이의 이복동생 은우였던 것이다. 은우는 은정이와 생김새가 많이 다르긴 했지만 은정이가 그집 장남 은환이 오빠와 은우 사이의 외모를 하고 있어서 생긴게 좀 다르다고 생각을 했지 크게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터였다. 자신은 이런 가정사에 대해 숨기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대해 새엄마가 이런 내용을 네 친구들이 안다면 좋을 게 없다고 간곡히 부탁을 해서 그간 이에 대해 함구해 왔다고 한다. 


은정이는 친엄마와 아빠가 이혼한 후에 이모네 집에서 키워졌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 친엄마는 서울로 상경해 부동산 일을 하셨고 많은 돈을 버셨다고 했다. 그런데 은정이가 아홉 살이 되는 해 엄마는 자궁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방안에 환자 특유의 냄새가 가득해 임종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직감했을 때 아빠는 엄마를 보러 왔다고 했다. 그 순간 친엄마는 아빠가 왔는데 그 자리에서 은정이와 은환오빠를 맡아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가셨다고 한다. 그것도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이모는 울면서 애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애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엄마가 가는 길에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도록 했고 은정이는 천장을 향해 눈을 뜬 엄마가 죽었다는 생각도 못한채 방안 가득한 시체 썩는 냄새 같은 그 냄새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한다. 


아빠는 엄마의 유언에 따라 은정이와 은환이 오빠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새엄마는 아빠가 전부인 사이에 낳은 애들을 데려오겠다 했을 때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하셨다고 한다. 새엄마 입장에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 둘을 들이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은정이와 은환이 오빠를 거두셨다고 했다. 여기까지를 듣는데 3시간이 지났다. 뇌가 흔들렸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시간의 속도가 빠른 경험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아 있는 은정이는 슬로우 모션처럼 더 크게 다가왔다. 눈의 초점이 나가버린 것이다. 


그리고 작년 여름 퇴직 후 천안으로 내려가신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에서 혼자 살 때 삶이 너무 고단한 나머지 자살을 마음 먹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친엄마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셨다고 한다. 사실 정은이는 꿈에서 친엄마를 본 적도 없고 그래서 기억 속에 엄마의 얼굴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 엄마 시집가?”

“아니, 천국 갈 준비하는 거야.”

은정이는 그런 친엄마를 붙잡고 정말 간절하게 빌었다고 한다.

“엄마, 엄마 천국가게 되면 꼭 새엄마도 같이 데려가죠. 엄마 다른 사람은 다 지옥가도 진짜 우리 새엄마는 꼭 천국에 가야하는 사람이야.”

나는 은정이가 꿈에서 새엄마를 부탁했다고 했을 때 은정이의 삶에 있어서 새엄마가 어떤 의미고 존재였는지 가슴으로 느꼈다. 그러고 보면 은정이는 새엄마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나 안 좋은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런 새엄마를 힘들게 하는 시댁식구들이나 아빠를 욕하면 욕했지, 새엄마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새엄마는 남편이 데리고 온 핏줄을 위해 수행과 같은 고난의 육아를 마다 않고 자식을 위해 장을 보고 자식을 위해 요리를 하고 자식을 위해 교육하고 또 자식을 위해 학부모 상담도 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새엄마는 자신이 구원하지 않아도 이해될 아이들을 구원했다. 그래서 자라난 자식이 천국이 있다면 마땅히 엄마의 것이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은정이의 그간의 삶들이 나에게도 아린 시간이 되어 내 가슴 속에 닿았다. 


은정이를 만난 후 나는 은정이가 없는 고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 그리고 나에게 은정이는 잘 살고 있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에게 은정이 안부에 대해 얘기를 해주며 이제 우리 나이 먹을 만큼 먹었는데 풀 수 있는 것들은 푸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마음에서 떠난 친구를 굳이 다시 만날 필요가 있겠냐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했다. 다들 자기들 사는 일로도 충분히 바쁜데 뭣하러 다른 사람을 인생에 끌어 들이냐는 말이었다. 우리는 십 년이 더 지나도 아니 영원이 되어도 다시 완전체로 자리를 함께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우리의 이해심은 세 살 어린 아이만큼도 못 했으니 되돌릴 수 있는 소중한 것들도 그렇게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의 안타까움이 증식하는 것을 모르쇠로 일관하는 중이다. 


나는 나의 상황을 이해해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친구는 은정이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은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정아, 나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야 할 것 같아.” 

이 말에 은정이는 정말 토하나를 안 달고 내 입장에서 내 말을 두둔하며 그리고 그 말들에 자신의 의견을 보강할 뿐 내 의견과 다른 자신의 입장을 새롭게 덧대지 않았다. 최대한 내가 선택한 일들에 대한 예를 아는 대로 찾아 내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할 지라도 나의 상황을 얘기하면 그들은 최대한 남편의 입장에서 남편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로 나의 상황을 접근한다. 대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은정이는 그러지 않았다. 철저하게 내 편이었다. 

“은영아! 미국에서 너랑 맞지도 않은 일하면서 고생하지 말고 한국에 와! 네가 마음먹고 일하고 돈 벌면 돈은 금방 모아. 네 능력을 내가 아는데, 너는 뭘 하든 잘 될 거야. 아직 젊잖아. 환갑 다 되어 이런 일 겪으면 정말 그땐 할 수 있는 일이라도 없을 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괜찮아. 충분히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설하, 너무 나빴다. 가족들 생각 안 하고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것들 최대한 다 누리려 하다가 이게 뭐야. 내가 너무 속상하다.”

나는 안다. 그 누구도 이런 극한의 상황에 처해 본적이 없을 테고 그래서 더더욱 위로라는 것들이 힘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위로를 있는 힘껏 나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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