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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뉼이 Oct 22. 2024

우리는 몰랐다. 한 치의 앞을

해가 지고 비교적 선선한 초저녁 시간 집근처 테니스장에서 규림이가 레슨을 받고 있을 때였다. 벤치에 앉아 아이 테니스 치는 것을 힐끔힐끔 보다가 가방에 챙겨뒀던 책을 본격적으로 꺼내 읽기 시작했을 무렵 한국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지금 이때쯤이면 한국은 새벽녘인데 일반적이지 않은 시간에 큰언니가 전화를 한 것이다. 다급하지 않은 목소리에 안도를 했지만 산영언니는 차분하지도 않은 음성으로 


“제부가 죽었댄다.”

“무슨 소리야?”

“자영이 남편이 죽었다고..”

“뭐라고?!”


산영언니와 나는 전날까지도 둘째 형부에 대한 험담을 나눴다. 이건 우리의 일상이자 의식과도 같은 것이라 특별할 것도 없었다. 우리는 매번 똑같은 이야기를 매번 처음 내는 결론마냥 심각하게 나눴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은 이혼을 하는 게 맞겠다고. 자영언니가 집안의 실질적 가장이라 이혼 후 생계 걱정에 막막하지도 않을 것이고 도대체 왜 그러고 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에 도달해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면 그 다음 날 다시 형부욕을 하고 그 집의 유일한 해답은 이혼이란 이야기를 영원회귀처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형부의 돌연사로 끝이 났다. 


형부는 아침에 일어나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고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언니는 일단 는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불렀다. 형부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을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언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를 감고 출근 준비를 했다. 그리고 구급차가 도착하자 형부와 함께 병원으로 이동한 것이 다였다. 그런데 형부의 각혈은 차 안에서 시작했고 그 뒤로 심정지가 와 유언도 없이 허망하게 가버렸다. 아무리 사람일 모르는 거라고 하지만 이 죽음은 형부조차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 사람인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영언니는 많이 힘들어했다.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을 때의 모습처럼 형부의 죽음을 그 누구보다 슬퍼했다. 형부에 대한 원망과 미움, 이 모든 것들이 연민으로 합쳐지면서 언니는 그렇게 형부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형부에 대한 증오의 악감정들에 대한 죄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영언니는 나에게 형부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딱 한 번 한 적이 있다. “니가 동생이라서 말하는 건데 내가 죽거나 그 사람이 죽거나 그렇게 우리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날 거야.” 그 때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못 알아 들은 것마냥 아무 대답도 안했다. 산영언니를 통해 둘째 형부가 우리들의 사촌인 은경언니랑 잤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은경언니는 우리 자매들 중에서 유독 자영언니랑 친했다. 그래서 논현동에 빌라를 얻어 혼자 살 때, 자영언니는 독립을 하고 그 집에 들어가 같이 살았다. 그런데 둘째 형부가 자영언니한테 “너는 아무 것도 모른다.”며 술 취해 늘어놓은 듣기 싫은 이야기 중 자기랑 은경언니랑 잤다는 것이 들어 있었다는 거다. 물론 아직도 우린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굳이 은경언니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그 말이 사실이어도, 그리고 사실이 아니어도 그 어느 쪽이든지 간에 입에 담기조차 더러웠다. 


자영언니의 울음이 잦아들었을 무렵 언니는 나에게 말했다. “정말 저 인간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몰라. 그런데 막상 죽으니까.. 그냥 불쌍한 거야. 불쌍하게 살다가 그렇게 간거지.” 형부에 대한 언니의 동정은 다시 형부가 그랬던 것처럼 시모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이제 언니는 형부 대신에 시모를 탓한다. 왜 형부가 그렇게 됐는지... 나는 아무 대꾸 없이 내가 왜 듣고 있는지도 모를 그 이야기들이 소진될 때까지 침묵 속에서 듣고만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자영언니가 그런다고 애를 써도 둘의 결혼에 없던 의미가 생겨나지는 않았다. 


유독 사주팔자를 맹신하는 엄마는 형부의 사주를 분명 받아 뽑아봤을 텐데, 형부에 대해서 혹은 언니와의 궁합에 대해서 이렇다할 말을 하진 않았다. 다만 조카들이 태어났을 때 한 명도 아니고 두 명 다 천살이 있다면서 항상 형부의 건강에 대해 걱정을 했다. 살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내가 유일하게 내용을 알고 있는 살은 천살이다. 사실 산영언니와 자영언니도 사주팔자에 천살을 타고 났고 산영언니와 자영언니의 친부 역시 언니들이 각각 세 살 한 살이 되던 해에 자식이 타고난 팔자에 영향을 받았는지 그렇게 가셨다. 자식이 천살을 타고 태어나면 부모 중 한 명은 애들이 채 성장하기도 전에 죽는다. 반복되는 우연은 통계를 만든다. 그리고 엄마가 뽑은 사주팔자와 그에 따른 근심 이들은 모두 운명처럼 적중했다. 


나는 아직도 형부의 죽음이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페이스북에 형부의 친구 신청, 미처, 아니 다분히 의도적으로 수락하지 않은 상태로 덩그란히 남아 있는데... 그가 없고 언니만 혼자 남아 있는 것을 보며 핏대를 세워가며 언니가 이혼을 하는 게 맞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지난날의 내가 부끄러워진다. 만약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언니를 이혼하게 만들었다면... 있지도 않은 인생의 순간을 만들어 보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영언니는 예전의 모습대로 아니, 그보다 더 억척스러운 모습으로 형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집을 리모델링 했다. 언니는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인테리어 공사도 하며 집안의 분위기를 싹다 바꿨고 여유를 부려도 되는 주말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 밥도 잘 챙겨 먹이고, 더 깔끔하고 깨끗한 집 상태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늦잠을 가서 하루 종일 늘어져 있는 나와는 달리 아침에 일어나서 라텍스 장갑을 끼고 하루를 알차고 부지런히 바쁘게 보내고 있다. 언니는 너무도 잘 살아내고 있었다. 남편 없는 인생을.


자주하는 기도는 아니지만 내 기도 속에는 늘 자영언니가 있다.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넘쳐나는 에너지를 품고 사는 언니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나는 늘 소망한다. 예전처럼 멋진 모습의 언니로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나의 이 간절한 바람이 꼭 언니의 삶에 닿아 소망이 현실이 되는 그 날, 그 어떤 삶보다 평온함을 누리기를 소원한다. 언니가 고난 속에서 현명하고 강해진 만큼 남은 삶은 언니의 확장된 능력으로 좋은 것들을 맞이하기를 진심으로 빈다. 울고 있어서 웃는 언니가 마냥 웃는 날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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