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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13. 2022

외국계 기업의 허와 실

애플과 애플코리아는 다른 기업입니다

제가 취업을 준비할 당시, 외국계 기업은 모든 취준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유연한 기업문화, 자율적인 업무분위기, 높은 연봉과 복지수준까지.  '외국=선진국=우수함' 이라는 산업화 시대의 학생들이 가진 막연한 환상이 작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한국기업에 비해 수적으로 적은 탓에 실제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선후배나 지인을 찾기 어려워 정확한 현실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저는 지난 십여 년 동안 몇 군데의 외국계 기업에서 일해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외국계 기업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분들이나 외국계 기업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제 경험을 일부 공유하고자 합니다.  (제 경험에 기반한 서술이므로, 객관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외국계 기업은 본질적으로 '한국 지사'의 성격을 갖습니다.


외국계 기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외국계 기업'이라는 용어의 본질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외국계 기업이라 함은 해외에 본사를 둔 외국기업이 대한민국에 설립하거나 투자한 기업을 말하며, 법률적으로는 외국인투자촉진법상 외국인투자기업(외투기업)을 말합니다.  즉, 외국계 기업은 본질적으로 외국기업이 대한민국에서 영업활동을 하기 위해 설립한 한국지사 또는 영업소의 성격을 가집니다.


여기서 외국계 기업이 영위하는 '영업활동'이란 대부분 판매(세일즈)를 의미하고, 대한민국에 직접 생산설비를 갖추고 제조활동을 하는 외국계 기업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물론 훌륭한 제조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을 외국기업 또는 자본이 인수하여 외투기업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경우 외국 본사는 대주주로서의 권한만을 행사하면서 창업자의 경영권을 보장해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따라서 국내 임직원들은 앞서 말씀드린 기업문화/업무분위기/임금 및 복지의 측면에서 인수 전과 후의 차이를 체감하기 어렵습니다.


주된 기능이 세일즈이므로, 당연히 인력도 세일즈에 집중되어 있고 회사도 세일즈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많은 의사결정에 세일즈의 입김이 작용하며, 인사/재무/법무 등 이른바 경영지원(백오피스) 기능은 최소화되어 있거나 아예 부재하여 본사의 지원(쉐어드 서비스)을 받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즉, 세일즈나 세일즈에 도움이 되는 직무(예컨대 마케팅)가 아니라면, 회사 내에서의 지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조활동을 영위하지 않으므로, 한국 지사에는 필요한 인력을 고용하는 것 이외에는 투자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계약의 경우 처음부터 외국 본사 명의로 체결하여 한국 지사에는 현금이 아예 흘러들어오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한국 지사는 본사로부터 배정된, 한정된 자본으로 사무공간/임직원 복지/사내행사 등에 필요한 비용을 전부 해결해야 하므로, 풍부한 현금흐름을 바탕으로 넉넉한 리소스를 제공하는 대기업에 비해서는 모든 것들이 부족하거나 왜소해 보이게 됩니다.


2. '제3국의 중소기업'이라는 지위에서 오는 업무비효율이 필연적으로 발생합니다.


2022년 현재 대한민국은 GDP 기준으로 전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규모를 가진 국가입니다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 주로 투자하는 북미/유럽의 국가들 입장에서 대한민국은 아직도 아시아 변방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한국사람들이 얼마나 우수한지, 한국시장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알지 못한 채 본사 위주의 정책이 내려오는 경우가 많고, 우리나라와는 전혀 맞지 않는 정책으로 한국 담당자들이 곤란한 상황에 놓이거나 비효율적인 업무 절차를 밟아야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축의금/부조금 문화를 불법적인 뇌물로 오인하고 재무담당자를 추궁한다거나, 공공입찰 과정에서 형식적으로 제출하는 청렴서약서 등 서류의 문언을 일일히 번역하여 검토한 후 수정을 시도한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한편 우리나라는 대외적인 경제 규모에 비하여 내수의 비중이 높지 않으므로, 외국계 기업의 국내 매출이 본사 전체 매출에 기여하는 비율도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게임 등 대한민국이 상당한 위상을 차지하는 산업도 있습니다만, 최근에는 이마저도 중국에게 패권을 빼앗기는 추세입니다).  당연히 한국 지사에 대한 지원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이는 각종 프로세스의 부재나 비효율적인 업무처리로 귀결됩니다.  


예컨대 제가 근무했던 모든 외국계 기업에서 (국내 대기업이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는) 전자결제/인사/재무관리시스템이 없거나 본사의 영문 시스템을 그대로 사용해야 했고, 이에 영어가 편하지 않은 한국 담당자가 이메일/엑셀로만 중요한 기록을 관리하거나 아예 기록관리를 포기하여 담당자 변경 시 업무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3. 리더의 스타일/역량에 따라 조직문화나 업무방식이 천지차이입니다.


외국 본사가 '아시아 변방'에 위치한 지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심하게 관리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과 같이 언어 및 문화가 북미/유럽과 많이 다른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따라서 본사는 믿을 만한 리더(지사장)을 선임한 후 그 리더를 통해 지사를 관리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지사장은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아 활동하게 됩니다.  물론 외국계 기업의 경우 이른바 매트릭스 조직(각 기능별로 별도의 보고라인을 가짐)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본사 입장에서  현지 지사에 대한 'visibility' 를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은 지사장이므로, 보고라인과 무관하게 지사장이 휘두를 수 있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국 본사가 해외 지사를 총괄할 지사장을 선택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본사에서 외국인을 파견하거나, 검증된 현지인을 고용하거나.  전자의 경우 현지 시장상황 및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직원들과 마찰을 빚는 경우를 많이 보았고, 후자의 경우 스펙이나 경력만 보고 채용하는 탓에 무능하거나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인물을 채용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물론 채용과정에서 레퍼런스 체크를 하기는 하지만, 외국에서 사전에 지정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영어로 하는 레퍼런스 체크와, 현지에서 다수의 업계 사람들을 상대로 한국어로 하는 레퍼런스 체크가 같을 수는 없겠지요.  더욱이 채용 후에도 다면평가나 입소문 등을 통하여 사후관리가 되는 국내기업과는 달리, 지리적/언어적 장벽으로 인하여 적절한 사후관리가 어려운 외국계 기업의 경우 이른바 '리더 리크스'가 상당히 큰 편입니다.  


4. 경력이 많을수록, 직급이 높을수록 다니기 좋은 회사인 경우가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부분의 외국계 기업은 현지상황에 맞는 인력관리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합니다.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이나 인재교육프로그램은 없거나 부실하고, 현업조직에서도 신입사원을 적절히 교육할 동기나 여유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회사에서는 당장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경력사원을 선호하고, 신입사원의 경우 기존 경력사원의 업무를 보조하는 용도(?)로만 활용할 뿐 적절한 교육을 통해 성장시키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습니다.  신입사원은 박봉과 잡무에 시달리다가 얼마 못 가서 퇴사하거나 이직하게 되고, 몇년 후 경력사원이 되어 다시 돌아옵니다.


한편, 현지 시장상황 및 현업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본사는 어쩔 수 없이 매출액이나 성장율과 같은 정성적 수치로 지사의 성과를 평가하게 되고, 이러한 수치를 달성한 공을 직급이 높은 리더들에게 돌립니다.  그 동안 리더들로부터 업무 진행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아온 본사로서는 그들의 기여도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문제는 본사와 실제 현업에서 발로 뛰는 영업사원들의 접점이 부족하여 성과분배 과정에서 이들의 공로나 기여도가 적절히 반영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외국계 기업은 '높은 사람들이 다니기 좋은 회사'가 되고, 실제로 관리직들의 근속연수가 실무자들보다 월등히 긴 경우가 많습니다.




글을 써 놓고 보니 단점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수평적인 기업문화와 성과 중심의 평가제도 등 다양한 장점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고, 이 때문에 외국계 기업만을 고집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특히 앞서 말씀드린 채용방식 때문에 외국계 기업 간 이직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며, 이른바 '고인물'들의 리그가 형성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외국계 기업으로의 취업/이직을 고려하시는 분들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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