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테난조 Dec 15. 2023

Episode 15: # 엉킨 실타래, 4화

외톨이로는 만들지 말아 줘.






Episode 15:

# 엉킨 실타래, 4화






11. 세수하러 왔다가 옹달샘의 물만 먹고 돌아간 토끼가 된 기분이다. 알 수 없는 소리다. 돌아가서 예전 글을 다시 읽으라고? 보고 싶지 않다. 보면 분명히 후회한다.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주위 사람의 고생을 모른 체하며, 꿈이라는 치트키를 입어, 누구에게나 위로와 응원을 받을 수 있는 빛 좋은 개살구다. 그래,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그랬다면, 지금도 글을 쓰겠지. 난 말이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살고 싶다. 결혼도 그래서 한 거다. 남들이 하니까, 때가 되면 하는 거니까. 그게 평범한 삶이니까. 비혼은 평범하지 않으니까. 물론, 아내를 사랑해서, 그녀를 평생의 반려자로 인생을 함께하기로 했다. 지금도 나의 사랑은 변함없다. 아이도 그래서 낳은 거다. 남들도 아이가 있으니까, 때가 되면 낳아야 하니까. 그게 평범한 삶이니까. 결혼 후, 자녀 계획은 없다고 하면 평범하지 않으니까. 물론, 내 아이를 무한대로 사랑한다. 아이가 없는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무한의 사랑이다. 아이를 키우면서, 많이 울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많이 후회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어른이 되어간다. 내 인생 중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내와 아이와 함께 하는 오늘이다.     



결혼과 출산은

가장 평범해질 수 있는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인생의 축복이다.      






12. 그렇게 평범하고 행복한 날을 누린다. 모든 게 자연스럽다. 호기롭게 회사를 퇴사하고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나의 행복 지수는 최고였다. 이렇게나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모든 날을 감사하며 살았다. 그리고 누구도 균열을 낼 수 없는 보장된 행복한 삶이라 믿었다. 영원하리라 장담했다. 지난날도 지극히 평범하다. 태어나서 보니까 부모님이 나를 반겨 주었다. 시간이 지나니 여동생이 태어났다.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난 여동생을 쾌나 예뻐했다. 그래,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가족을 이루었다. 가족의 구성은 당연한 순리다. 고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내 주위 모든 지인 또한 가족이 있으니까. 남들도 다 가진 평범한 일이다. 고등교육을 마친 후, 고민 없이 대학교에 진학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간다. 대학을 졸업 후, 취업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다. 그래,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난 결혼한 후,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났다. 이 과정은 당연한 순리다. 고민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내 주위 모든 지인 또한 이렇게 살아간다. 남들도 다 가진 평범한 일이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거다.      


내가 가진 평범함이.

내가 느끼는 행복함이.

내가 생각하는 당연함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치라는 사실을.       






13. 글을 쓴다고 골방에 처박힌 2년, 단 2년 만에 누구도 균열을 낼 수 없다고 믿었던,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했던 행복은, 균열을 넘어서 산산이 조각난다. 밑창이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신고 등교하는 웃음기가 사라진 사랑하는 내 아이. 깊은 팔자 주름과 푸석한 피부로 어느새 할머니가 돼버린, 불과 몇 년까지만 해도 올리비아 핫세의 외모를 자랑했던, 백옥 같은 피부를 지녔던 사랑하는 내 아내. 집에만 있어서 그랬을까? 방문을 닫아도 골방에서 퍼지는 나의 체취는 집 안을 쉰내로 진동하게 한다. 그래, 그런 줄 알았다. 처음에는. 하지만 집 안에 진동하는 쉰내의 주범은 빨래 더미다. 아내가 빨래하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었다. 예전에는 일주일에 3번은 빨래를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도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집에만 있으니 이를 더욱더 적나라하게 확인한다. 거실 한쪽에 거대하게 쌓인 빨래가 보인다. 미안한 마음에 빨래를 세탁기에 넣는다. 아무리 보아도 세탁세제가 보이지 않는다. 집에 세탁세제가 없다. 평범하고 당연한 세탁세제가. 미안한 마음에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쉰내가 가득한 빨래 더미를 다시 꺼내어 있던 자리에 놓는다. 하지만 난 아내에게 묻지 않았다. 집에 왜 세탁세제가 없냐고. 물어보는 순간, 그나마 희미하게 유지하는 가족도 사라질 것 같아서다. 그리고 한동안 그 빨래 더미는 그 자리를 지켰다. 어르신의 쓸데없는 소리로 그때가 떠올라 마음만 싱숭생숭하다. 그래도 어르신 말대로 예전 글을 보기는 할 거다. 그래야 다음에 만나서 대화할 수 있으니까. 다음에 만나면, 주도권을 뺏기지 않고, 바로 본론을 들어가야 한다. 1,000만 원이 적었던 게 분명하다. 휴, 영감님, 그냥 이사하시라고요. 좀. 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평범하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평범한 행복도, 당연한 행복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행복은 치열하게 삶과 맞선

투쟁의 결괏값이니까.      







14.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연다. 머스크 향이 묻어나는 고급스러운 비누 향은 내 코를 자극한다. 무의식적으로 빨래가 쌓인 자리를 바라본다. 빨래 더미는 보이지 않는다. 건조대에 널린 빨래를 바라본다. 안방에서 누군가 나온다. 아내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저녁을 먹었냐고 묻는다. 밖에서 먹었다고 말한다. 아내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는다. 손에 든 리모컨을 빼앗아 자기가 보고 싶은 채널을 튼다. 드라마다. 아내는 몰두한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그녀는 말없이 바라본다. 당장이라도 뛰어가 그를 잡고 싶지만, 그녀는 이내 그만둔다. 드라마에 몰두한 아내는 소리친다.      



“바보야, 당장 뛰어가서 잡으라고!”      


그래, 이러면 된 거다. 이러면 된 거다.

무엇을 더 바라는 게 욕심이다.      



드라마를 같이 볼 재주는 없다. 지루하고 따분해서다. 조용히 일어난다. 아내의 몰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다. 한동안 가지 않았던 서재로 발걸음을 돌린다. 애증의 장소인 서재에 다양한 감정을 묻어 두었다. 어리석음, 무모함, 허세, 만용 등. 서재를 한동안 가지 않았다는 말은 거짓이다. 오늘처럼 대놓고 들어가지 않는다는 소리다. 방문을 열 용기가 좀처럼 나지 않아서다. 그래서 조명이 꺼진, 어둑한 밤이 다가와 모두가 잠들면, 가끔 몰래 서재에 들어온다. 무엇을 하려고 들어온 것은 아니다. 정리하지 못한 애증의 감정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일까? 의자에 앉아 책상에 놓인 작은 스탠드 등을 켠다. 스탠드 등이 비치는 작은 범위, 가로로 100cm도 안 되는 작은 책상을 감싸지도 못하는 그런 작은 범위, 그 정도의 범위가 딱 좋다. 애증을 즐기기는. 책상 한편에 커터칼로 새긴 과거의 결심이 보인다.      



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正     







15. 물리적으로 골방에 갇힌 세월은 2년이 맞다. 하지만, 난 어느 순간부터 글을 쓰지 않았다. 그냥 종일 앉아 있었다. 더는 소재가 떠오르지 않아, 더는 캐릭터와 대화하기가 어려워 쓰지 못했다. 커터칼로 새긴 날짜가 그 무기력함을 말해준다. 불타는 열정을 에너지로 환원해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 믿었던, 내 꿈은, 405일 만에 동력을 다 했다. 글을 쓰지 못한, 괴로움의 나날 동안, 난 그저 아내에게 왜 글을 포기해야 하는지, 그런 시답잖은 핑계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고 완벽한 핑계가 다가온다. 우현이의 일자리 제안이다. 그렇게 얕은 뚝심과 한심한 창의력으로 글쓰기를 주저한 내게, 가족의 안위[268]는 글을 버릴 수 있는 아주 합리적인 핑계다. 난 아버지니까. 난 남편이니까. 난 가장이니까. 그렇게 마치 선심 쓰는 양 글쓰기를 멈춘다. 용기를 내어 지난날의 상처를 들춰 보기로 한다. 노트북을 켠다. ‘미완성 폴더’를 클릭한다. 그리고 ‘미완성 파일’을 클릭한다. 어르신이 말한 대로 답을 줄지도 모른다. 열린 파일을 바라본다. 그리고 글을 찬찬히 읽기 시작한다. 글을 읽을수록 끝내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끝낼 수 없다는 확신이 섞인 지난날의 괴로움은 나를 삼킨다. 심경 변화는 없다. 한결같다. 이래서 보고 싶지 않았던 거다. 영감님의 말을 믿은 내가 순진했다. 장황한 말로 그저 날 내쫓고 싶었던 거다.      



이루지 못한 과거의 꿈은

상처로 인해 생긴 딱지다.      



딱지는 세균의 침입을 막으려는 방어체제다. 하지만, 가렵다. 완벽하게 외부의 이물질을 막지 못해서다. 가려운 딱지를 뜯어낸다. 뜯어낸 당시는 보기는 흉해도 시원하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다. 피와 진물이 아물지 않은 상처 주의를 곪게 한다. 가려운 딱지를 뜯어낼수록 회복의 시간은 더디다. 과거의 꿈도 그렇다. 자꾸 생각난다. 자꾸 들춰,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서, 가려운 과거의 꿈을 뜯어내면, 그렇게 다시 들추면, 조금은 행복하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희망도 보인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결국, 과거에 포기했던 그 지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해서다. 그 지점을 극복하려면, 현재 상황이 변해야 하는데, 과거의 꿈을 다시 들췄다면, 현재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그렇기에 또다시 포기해야 한다. 괴로움과 씁쓸함은 배로 증가해 우리의 삶을 파괴한다.      



딱지는 죽은 세포다.

죽은 세포는 다시는 살아나지 못한다.      



더는 이루지 못한 과거의 꿈을 들춰, 새살이 돋아나는 회복의 기간을 늘리고 싶지 않다. 딱지가 생겨 상처 부위가 가렵다는 뜻은, 새살을 돋아나게 하기 위한, 인체가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과정이다. 그러니까, 가려워도 참아야 한다. 그러니까, 가려워도 뜯어내면 안 된다. 그 과정을 견뎌야 새살은 돋아난다. 새살이 돋아나야 더는 가렵지도 더는 아프지도 않다. 카테피아의 건설로 많은 이에게 인생 2막의 기회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루지 못한 과거의 꿈을 극복해 새살을 얻는 결과물이라 믿는다. 이루지 못한 과거의 꿈이 딱지가 되어 새살을 돋아나게 하는 여정은 행복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다. 행복은 멀리서 나를 기다린다. 그렇다면, 그 과정이 어찌 괴로울 수 있는가?  아니, 행복을 누가 달콤하다고 말했는가?



더는 과거의 아쉬움에 사로잡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죽은 세포인 딱지를 부둥켜안아

‘양패구상’[269]하는 그런 삶은 거절한다.   



to be continued....



[268] 안위 (安危): 안전함과 위태함.

[269] 양패구상(兩敗俱傷)은 두 사람이 싸우다가 서로 다치는 것을 뜻하는 말. [출처: Bard]

매거진의 이전글 Episode 15: # 엉킨 실타래, 3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