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촌부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래여 Jul 01. 2024

사랑은 주고받는 거다

사랑은 주고받는 거다    

 

 낯선 차나 사람이 삽짝에 들어서면 개가 짖는다. 우리 집 보리는 사람 나이로 치면 사오십 대가 아닐까. 영리한 개다. 낯선 차라도 주인이 손님을 반기면 금세 짖기를 멈춘다. 손님이 한 이틀만 우리 집에 기거하면 낯선 차가 밖에 나갔다 와도 짓지 않는다. 그 보리가 요즘 살판났다. 저녁나절이면 딸과 산책을 다니기 때문이다.


 딸은 며칠 째 전기 자전거를 타고 시댁을 오간다. 시부모님 세간을 정리하는 중이다. 나와 농부는 시댁 드나드는 것조차 불편하다. 사십 수년을 들락거리던 시댁이다. 시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아이들이 너덧 살 되어 분가를 해도 시댁은 내 집이었다. 시댁은 농부와 내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고인이 쓰던 물건이라지만 내 손 안 간 것이 없다. 물건을 치워야하는데 엄두가 안나 차일피일했었다. ‘엄마, 내가 할머니 집 정리해서 이사 올까?’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든가.’ 딸은 돈벌이 하던 교사자리를 접어버리고 일 년간 백수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딸은 시댁을 정리해서 귀농을 하겠단다.


 막상 딸이 곁에 온다니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배운 것이 아깝다. 어려서부터 영재 소릴 듣던 딸이다. 일류 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일류 대학원을 수료한 상태다. 논문만 내면 되는데 차일피일한다. 무슨 일이든 저 하기 싫으면 못한다. 배운 것들 풀어먹는 것도 사회를 위하는 일인데 공부하는 것은 재미있지만 직장생활은 싫다니 어쩌겠나. 경제개념 키워주지 못한 것도 부모 탓이다. 의식주 해결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어보면 필요한 만큼 벌어 쓰면 된단다. 지금은 괜찮지만 노후에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어보면 자기 복만큼 살게 되어 있단다. 끓지도 않고 넘친 것인지. 돈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은 절실하게 가난을 못 겪어서인지 모르겠다. 


 엄마아빠는 돈 없어도 우리 잘 키워주시고 잘 살잖아. 나도 자급자족할 만큼 농사짓고 살 거야. 돈은 필요한 만큼만 벌어 쓰면 돼. 

 텃밭농사 짓고 시골에 묻혀 살고 싶다는 딸이다. 

 그럴 거면 악착스럽게 공부는 왜 했니? 읍내 고등학교 졸업장 따서 농사나 배우지. 부모 고생시키고 너도 고생했는데. 농사는 아무나 짓는 줄 아나?

 엄마아빠가 노인이 됐잖아. 딸이 옆에 있으면 좋잖아. 엄마가 아프니까.

 일 없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사는 거고 너의 인생은 네가 사는 거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인가. 어미로서 마음고생은 하지만 어쩌겠나. 야무진 딸이 곁에 있으니 편하고 좋다. 딸도 행복하다는데 무슨 말을 하랴. 딸은 잔디를 깎고 텃밭을 돌본다. 독서와 글쓰기, 그림그리기, 농사짓기 하면서 부모 모시겠다는데. 부모를 대물림하려는 딸이다. 넉넉하게 키운 적 없지만 마음 부자로 키우고 싶었던 남매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남매는 곱게 키우고 싶었다. 명품 운동화 한 켤레 사 준 적 없고 용돈 넉넉하게 준 적 없다. 남매는 성적우수 장학금으로 부모를 도왔고, 저희들 앞가림을 했었다. 


 딸에게 대학원 졸업하면 어디든 직장 잡으라는 닦달하지 않은 것이 잘못일까. 두 아이는 스스로 제 인생을 잘 살 것 같았다. 너희들 인생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어떤 길을 가든 너희가 행복하면 된다. 그랬는데. 막상 가방 끈 긴 딸이 일찌감치 명상에 심취하고, 전원에 취해 직장이나 도시생활에 부적응하는 것을 봤을 때 충격이었다. 젊은이들답지 않게 사치와도 거리가 멀다. 돈 욕심도 없다. ‘돈 많이 벌어 뭐 할래? 쓸 만큼만 있으면 되지.’ 그 쓸 만큼이 문제라고 하면 ‘신기하게도 내가 필요한 돈은 어디서 들어와도 들어오더라. 엄마, 걱정 마. 딸은 잘 사니까. 엄마, 돈 필요해 얼마 줄까?’ 환하게 웃는 딸이다. 


 아무튼 딸이 있으니 농부의 얼굴이 빛난다. 부녀가 죽이 잘 맞는다. 성격도 취미도 비슷하다. 농부랑 딸은 새벽에 일어나 명상하고 농부가 바깥일을 하는 동안 딸은 아침을 챙긴다. 나는 늦잠에 취해 깨울 때까지 잔다. 원래 부부는 반대성향으로 만나야 찌지고 볶으면서도 못 헤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농부와 딸처럼 죽이 잘 맞는 부부가 만나야 백년해로 하는 것인지. 


 오후에 딸의 손잡고 수영장 다녀오면 딸은 자전거 타고 시댁에 간다. 딸의 자전거가 멀어질수록 보리의 짖는 소리가 애달프다. 그때부터 딸이 올 동안 보리의 눈은 길 아래로 향한다. 보리는 목 빠지게 딸을 기다린다. 내게로 향하던 보리의 애정이 딸에게 옮겨 간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랑은 주고받는 거다.

                       2024.   5. 

매거진의 이전글 밥그릇 두 개가 부딪히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