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1-3>
데니슨이 쓴 <꽃>이란 시가 생각났다.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끼우고 벽과 벽의 틈새에 웅크리고 앉아 방바닥을 내려다 봤다. 손톱으로도 잡을 수 없을 만큼 작은 개미 두 마리가 밥풀대기인지, 과자 부스러기인지 구분이 안 되는 알갱이 먹이를 놓고 줄다리기를 했다. 순간 나는 독 오른 뱀처럼 손톱으로 한 놈의 허리 중간을 작신 분질러버렸다. 짜릿한 쾌감이 눈가를 파르르 떨게 했다. 방바닥에는 상체만 남은 개미가 입에 문 먹이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가느다란 앞발로 기어갔다. 뒤에 남은 몸통은 몸통대로 꿈틀거렸다. 구역질이 났다. 개미를 죽인 손톱을 봤다. 무릎에다 손톱을 쓱쓱 문질렀다. ‘악물할거야.’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방바닥을 봤다. 동료의 죽음에 위기감을 느낀 다른 개미가 잽싸게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 놈도 잡아서 방바닥에 문질러버리고 싶었다. ‘아무리 하찮은 미물이라도 살아있는 것을 해치면 악업이지.’ 또 목소리가 들렸다. 저 개미는 불개미일까? 복수 할까. 개미산을 쏘아 제 동료들을 불렀을까.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개미처럼 나에게 덤빌지 몰라. 내 몸을 새까맣게 덮는 개미떼의 환영이 보인다. 까만 덩어리, 꿈틀거리는 점들이 온몸을 슬슬 기어 다니는 것 같다.
나는 개미떼를 찾아 방바닥을 두리번거리다가 더 이상 칙칙하고 누리끼리한 장판을 보기 싫어 눈을 감았다.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은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정녕 그대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신이 무엇일까. 신의 존재가 있을까? 문득 신이란 존재를 믿고 싶다.
지난 가을 나는 아버지께 결혼 의사를 밝혔다.
"그랬구나. 통 말을 안 하니 우리가 알 수가 있어야제. 잘 생각했다. 인자 니는 할 만큼 했다. 작은 아는 큰 아가 뒷바라지 하모 된께 걱정마라. 니가 어련히 알아서 하것나마는 잘 알아보고 해라.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니라. 알고 지내는 사람이 그 나이에 마땅한 직장이 없다니 그것도 걱정이구나. 너거 어마이도 좋아 할기다. 혼기 놓친 딸 가진 부모 심정을 니가 알랑가 모르지만 인자 안심이 된다. 늘 목에 가시가 걸린 거 맹키로 갑갑하더마. 니가 말은 안 해도 내 니 속을 안다. 니도 가심에 맺힌 응어리가 깊것제..... 애비의 죄가 많다. 진작 니 짝을 찾아조야 했는데. 딱 잘라서 혼인할 생각 없대서. 니 맘이 워낙 단단해 보여서 우리 내외는 눈치만 본 셈이니라. 온제 쯤 날을 받을래? 혼인 준비 할라모 바뿔 낀데."
"간단히 식만 올리려구요. 그 사람도 그것을 원하구요. 제 사정을 잘 아니까. 그 사람이 봄쯤 날을 잡자고 해요."
"날 잡기 전에 사돈 될 사람들 하고 인사는 해야 제. 니 동생을 먼저 장개 보냈으니 개혼은 아니다만 그래도 니가 우리 집 장녀 아이가."
"그렇잖아도 조만간에 그 사람 집에 인사 가기로 했어요."
"댕기 와야제. 혼인은 인륜지대산데 너거들만 좋다고 만사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라. 사람 속이란 모르는 법, 집안 내력도 알아보고, 시어른 되실 분들의 성품도 살펴봐야 할 일이니라."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나직이 불렀다. 어둑한 방안을 들여다보며 아버지는 우울하고 슬픈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보지 마셔요. 아버지는 제 속을 모르실거예요. 어머니가 저의 결혼을 좋아 하신다구요? 아니에요. 지금의 제 꼴을 아신다면 어머니는 고소해 하실 걸요. ‘네까짓게 잘났으모 올매나 잘났노, 꼴 조오타.’ 하시겠지요. 전 알아요. 어머닌 절 몹시 미워하시죠. 전혀 내색하신 적 없지만 절 사랑하신 적도 없어요. 아버지, 그 여인은 누구였나요? 언뜻언뜻 구름 속에 가렸던 햇살 한줄기 비추다 다시 구름에 가려지듯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들. 그 여인에게 저는 뭐였죠? 아버지는 아시고 계셨죠? 제가 결혼 하겠다고 말씀 드렸을 때 하신 말씀이 이것인가요? 열길 물 속 운운할 적에 그 여인을 염두에 두신 건가요? 아버지가 제 속내를 어찌 알겠어요. 아버지, 아직도 남았나요? 제가 갚아야 할 빚이, 도대체 그 빚을 어떻게 청산해야 하나요? 아버지, 당신의 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고 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전 가정을 가질 자격도 없는 건가요?’
나는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5년을 사귄 한 남자의 모든 것 중에 적어도 진실을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제까지의 일이다. 봄이 오면 그 남자의 아내가 되어 아침마다 밥상을 차리고, 저녁마다 그 남자의 품에 안겨 잠들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허벅지를 꼬집으며 확인을 했던 것도 분명 어제까지의 일이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왜, 텅 빈 회색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독 오른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도 소금에 절인 푸성귀마냥 축 쳐져서 천정만 올려다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우리 식 올리기 전에 한 번 더 지리산 등산을 하고 오자. 겨울 세석 평원은 신비 그 자체란다. 오색 빛깔을 내는 설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에게 보여주고 싶어. 내대 거림 쪽으로 올라갔다가 쌍계사 쪽으로 내려오자. 세석평원 밑에 신비한 바위샘이 있거든. 음양수라고 하는데 그 물을 마시면 첫 아들 낳는다더라. 올라가는 길에 장인 장모님께 인사드리고 갈까?"
"등산복 차림으로?"
"뭐 어때. 산에 가는 길인데."
분명 지금쯤 하얀 설원으로 뒤덮인 지리산 세석평원에서 등산 장비를 풀어놓고 뜨거운 커피를 끓이고 있어야 마땅하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꼬이기 시작했는지 아직도 꿈속을 헤매는 것 같다. 방안을 휘둘러보았다. 어둑어둑한 것이 하루해가 진 것인지, 아직 날이 밝지 않은 것인지, 한 낮인지, 시간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어제, 토요일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