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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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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Dec 01. 2024

문중 시제 모시는 날

문중 시제 모시는 날    


 

 햇살이 났다. 단감 따 들이기 좋은 날이지만 농부는 시제 모시러 재실에 갔다. 몇 사람이나 참석할지. 문중도 삭아간다. 제수거리 장만하고 점심 대접하는 것이 여자 몫이었던 때가 있었다. 시집온 이래 오랫동안 관행이었다. 시어머님 하던 것을 내가 받아서 하면서 불만도 많았다. 젊을 때는 동네 친인척 할머니부터 아주머니까지 총 출동했었다. 남자들은 재실에 모여 앉아 환담을 나누어도 그 뒤치다꺼리는 여자들 몫이었다.

  

 내 어릴 때는 시제를 산소에서 지냈다. 우리 동네는 남명 조식 선생의 산소가 지척에 있다. 남명 조식 선생 시제는 음식이 푸짐했다. 먹을 것이 귀했던 그 시절에는 부잣집 시제 모시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아래위 동네 조무래기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엄마나 할머니가 챙겨 준 보자기나 소쿠리 하나씩 들고 산소에 집결했다. 할머니도 내게 보자기를 주며 떡 얻어 오라고 했다. 나는 우리 집에 밥을 얻으러 오는 거지가 생각나 싫었다.

 니 인절미 묵고 싶다 캤제? 거 가모 인절미랑 찌짐을 수북이 준다. 용이 아부지도 거 있다. 니가 뉘 집 새깽인지 아는데 마이 주끼다. 욱이가 아까부터 지달린다. 퍼떡 가래도?


 할머니의 등살에 떠밀리기 일쑤였다. 용이 아버지는 아랫집 천얌 할머니 아들이다. 남명 조식 선생 후손이라고 목에 힘주고 사는 양반이다. 동네 터줏대감 노릇을 하지만 노랭이다. 그 집이 그나마 동네에서 인심을 잃지 않는 것은 용이 어머니 덕이다. 심성이 곱고 품이 너른 용이 어머니는 어른들 알게 모르게 이웃에 베푸는 것이 많았다. 밥 굶는 집이 있으면 쌀과 보리를 퍼다 주고, 가을 타작하고 남은 북데기라도 털어 먹으라고 걷어가게 했다.  


 빨리 가자 쿵께 머 하니. 시사 다 끝나겠다. 내 먼저 가끼다.

 삽짝에서 기다리던 욱이가 발을 동동 굴렀다. 욱이는 동갑내기 친구다.   


 나는 욱이를 따라 대나무 사이 길로 질러 남명조식 선생 산소에 간다. 산소 앞에는 봄날 훼치 꾼이 모인 것 같다. 산소 앞에는 삼베나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유건을 쓴 후손들이  줄을 섰다. 제주가 향을 피우고 제문을 읽고 후손은 절을 했다. 그동안 조무래기 들은 산소와 떨어진 곳에서 시제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며 미끄럼을 탔다. 시제가 끝나고 제주는 아이들을 불러 줄을 세웠다. 산소 앞에 차렸던 갖은 제수거리를 거두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떡과 부침개, 조기, 돼지고기, 소고기, 여러 종류의 과일, 대추, 밤, 강정 등등. 아이들은 침을 꼴깍꼴깍 다시며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제삿밥이 맛있다. 혼백이 먹고 가서 그럴까. 시제 모시고 나누어주는 음식도 맛있다. 한 보자기에 여러 가지가 섞여 깔끔하지 않아도 귀한 음식이었다. 그 음식을 할머니께 갖다 드리면 할머니는 ‘돼지괴기는 몇 모타리 안 되네 무 치우자.’고 하셨다. 생선은 무를 삐져 넣어 삼삼하게 생선탕을 해 주셨고, 떡은 말려 놨다 겨울 간식용으로 주셨다. 추억을 소환하다 보니 말랑말랑한 찰떡이 먹고 싶다. 농부가 한 보따리 갖고 올까. 은근히 기다렸다. 여자들은 잔칫집 가면 아이들 생각해서 남은 음식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싸 오지만 남자들은 안 그런다. 특히 농부는. 우리 집에서 제수거리를 장만해 가도 몽땅 나누어주고 빈 함지만 챙겨 오곤 했었다. 


 나는 아들이 선물한 책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으며 농부를 기다렸다. 최은영 젊은 작간데 책 속의 이야기는 내가 쓴 소설 속에 나왔음직한 이야기들이다. 아들이 그 작가의 소설을 읽어보라고 권한 이유를 알겠다.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 세대의 이야기에서 내가 아는 구전이 나온다. 비슷한 사고를 가진 작가랄까. 물론 나와 다른 필력이지만 소설 속 이야기가 생소하지 않아 그 작가에게 호감이 간다.   

 역시나 농부는 남은 막걸리 한 병들고 왔다. 


 찰떡 먹고 싶어 기다렸는데.

 뿌루퉁하게 말하자 

 내 모가치 싸려는 것을 고만두라 캤다.

 그 많은 음식 유사가 도로 가져간 거요?

 젊은 사람들끼리 나누어 가겠지.

 내 떡 조오.


 어린애 투정 부리듯 어깃장을 놓다가 웃고 말았다. 

 날씨가 살살 추워질 조짐이다. 예전에 시제 모실 때는 살얼음이 얼었었다. 여자들은 난달인 재실 아궁이 앞에서 시제 끝나기를 기다리며 따뜻한 국솥에 손을 녹이던 시절이 있었다. 이삼일 씩 시제 음식 만드는 것과 이틀 전에 도착한 어른들 끼니봉양이며 시제 날 참석한 남자들 점심대접하고 뒷정리까지 여자들 몫이지만 여자는 입도 뻥긋 못했다. 소곤소곤 수다 떨다 어른께 혼찌검이 나기도 했었다. 입 다물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허드렛일만 묵묵히 해야 했던 시절, 십여 년 전까지 그랬다. 

 나는 다시 최은영의 『밝은 밤』을 편다.      

              202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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