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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그냥 사는 거다

by 박래여

그냥 사는 거다



햇살은 맑은데 바람은 차다. 빨래를 널면서 무심결에 ‘춥다.’ 몸을 움츠린다. 더울 때는 덥다고 추워지면 춥다고 우울해하고 짜증내는 단순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를 생각한다. 늘 빨래를 널고 개키는 것이 일상이라 무심하게 넘어가기 일쑨데 오늘은 다르다. 이마를 따끔따끔 비추는 햇살 때문일까. 까뮈의『이방인』속 뫼르소를 생각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도 연애도 직접 살인을 했지만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왜 그랬을까. 허무주의, 나는 뫼르소의 무관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세상은 부조리하고 인간은 그 세상을 살아간다.


살인자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뫼르소는 ‘찾으려는 것 자체가 부질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죠.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입니다. 억지로 느끼려 하지 않습니다.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시간 낭비니까요. 그냥 사는 겁니다, 오늘 하루를요.’ 뫼르소와 비슷한 생각을 할 때가 많다. ‘그냥 사는 겁니다. 오늘 하루를요.’ 명쾌한 답이 아닐까. 사형 언도를 받아 죽음이 결정되어도 뫼르소는 그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살아야 할 의미를 잃어버려서 그럴까. 젊은 그가 어떻게 삶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릴 수 있었을까. 뫼르소는 도통한 사람일지 모른다.


우리는 희로애락의 틀에서 벗어난 사람을 도인이라 부른다. 마음의 길을 잘 닦는 사람의 특징은 뭘까. 내면 들여다보기를 잘 하는 사람이 아닐까. 겉으로만 뻗은 눈을 마음으로 돌릴 수 있으면 희로애락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마음의 눈은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스스로 자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일까. 처녀시절부터 정신세계에 대한 배움의 욕구가 강했다.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교만한 생각도 했었다. 칠십 밑에 앉아보니 바뀐 게 별로 없다. 젊었을 때나 지금이나 마음은 번뇌로 들끓을 때가 많다. 달라진 것이라면 젊었을 때처럼 죽을 것처럼 괴로워하지 않다는 거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에크 하르트 톨레가 한 말이든가. 그 말이 진리라는 생각을 한다.


지나간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을 당했을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퇴색하게 된다. 어쩌면 좁고 편협했던 마음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 농부가 이유 없이 짜증을 낼 때 농부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서 짜증을 감지하는 것도 예민한 내 촉수다. 왜 화났느냐고 물으면 ‘내가 언제 화냈노?’ 되받아치는 것도 합당하다. 책을 신경질 적으로 던질 때 ‘왜 그래요?’ 물음 한 마디에 ‘내가 머 했는데?’ 싸늘한 반응도 따져보면 내 선입견일 수 있다. 진짜 내게 화가 났다기보다 자신에게 화가 났을 수도 있고 화가 안 났는데 농부가 화났다고 내가 느낄 수도 있다. 타인이 내 거울이라 하던가. 남편을 타인이라 칭하기엔 어패가 있지만 내 중심으로 생각하면 남편도 타인이고 자식도 타인이다.


시월 말이 되었다. 윤 유월이 든 올해는 여름이 길었고 가을장마도 길었다. 그 탓인지 단감 작황이 좋지 않다. 상강 지나자 밤낮의 기온차가 확실하다. 단감은 날씨가 추워져야 맛이 들고 굵어지기도 하고 익는다. 이웃 과수원은 시월 초부터 단감을 솎아내기를 하고 있다. 서울 가락 동 시장의 단감 가격도 좋지 않다. 우리 집에도 단골 고객들이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한다. 맛있는 단감 언제 먹을 수 있느냐고. 시월 말까지 기다리라고 대답하면서도 예전처럼 초조하지 않다. ‘그냥 사는 거다. 오늘 하루를.’ 『이방인』의 뫼르소 말처럼 억지로 하지 않으려 한다. 상대방의 말에 의미를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때론 무심이 천심이다.


뒤꼍 무덤가에 보랏빛 쑥부쟁이 한 무리가 피었다. 억새와 솔새 사이에 빛나는 꽃이다. 그 곁에 칙칙하게 변하는 칡잎조차 보랏빛 쑥부쟁이를 돋보이게 하는 애잔함을 지녔다. 저 꽃 또한 며칠 후면 지저분하게 지리라. 사람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활짝 피었을 때는 세상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오만함으로 빛났을지 모르나 질 때는 아름답지 않다. 나도 마무리해야 할 계절을 살고 있다. 농부의 마음이 어떤지 가늠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나 때문에 짜증났는가. 예민하게 굴 필요도 없다. 단감 작황이 좋지 않아 돈이 안 된다 해도 짜증낸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좋은 일과 궂은일은 번갈아가며 찾아온다. 머피의 법칙이나 셀리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 인생이다.


올 가을은 아들이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으니 대복이다. 나는 농부가 짜증을 내든 웃든 당신 몫이라고 생각한다. 농부와 나 사이에 낀 딸이 눈치를 본다. ‘괜찮아. 내가 예민하게 군거야.’ 딸을 다독거린다. 딸은 또 딸의 입장에서 ‘나 때문에 엄마아빠가 다툰 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지 않길 바란다. 어느 집이나 항상 화기애애할 수는 없다. 산다는 것은 소소한 마찰음이 틈새에 끼어 있어야 오히려 살맛이 나는 것은 아닐까. 밋밋한 것보다 톡톡 쏘는 맛에 매운고추를 즐기듯이.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는 것도 생각일 따름이다. 주어진 자리에서 그냥 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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