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출장 다녀오는 길에 어느 거리를 지나다 보니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어느 신설 기관에 발령을 받고 동분서주하던 때의 일이다.
신설 기관이니 뭐든 새로 만들어야 했다.
시청, 세무서, 등기소 등 여러 기관을 다니며 업무를 처리해야 했는데, 아주 최소의 인원만 배치된 상황이라 그 모든 게 내 몫이었다.
나는 평소 운전을 잘하지도, 좋아하지도 않고 특히 주차 복잡한 곳은 질색인 사람이다.
따라서 바쁘게 이동할 때면 주로 택시를 이용했는데, 그러다 보니 하루에 서너 번 택시를 탈 경우도 있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루였다.
그날따라 택시가 잡히지 않아 좀 짜증이 났다.
방문했던 기관에서 업무 처리가 지연되는 바람에 몹시 지쳐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한참 동안 기다렸더니 택시가 한 대 와서 섰는데, 상당히 험한 인상의 기사님이었다.
현상수배범 포스터에서나 볼 법한 무섭고 무서운 인상.
밤이라면 그냥 보냈을 테지만 환한 낮이었고, 게다가 피곤한 상태라 그냥 택시에 올라탔다.
대신 운전사 옆 좌석 대신 뒤 좌석으로 앉았다.
한 5분쯤 지났을 때, 길이 막혀 한숨이 나려던 참이었다.
익숙한 멜로디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풀잎새 따다가 엮었어요.
예쁜 꽃송이도 넣었구요.
그대 노을빛에 머리 곱게 물들면
예쁜 꽃모자 씌워주고파...
어느 순간, 라디오에서 들리는 노래 위에 맑은 남자 목소리가 더해져 있었다.
세상에... 무시무시하게 생긴 그 기사님이 그 예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 거였다.
게다가 상당한 미성이었다.
이건 뭐, 어깨에 장미 문신을 한 노랑머리 여자가 다소곳이 앉아 꽃자수를 놓는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잠시 뒤 그 합창에 목소리가 하나가 더해졌는데,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내 목소리였다.
노을빛 냇물 위엔 예쁜 꽃모자 떠가는데...
너무나도 맑은 아이들 목소리와, 조폭 같은 기사님의 반전 목소리와, 삶에 지친 '직딩' 아줌마의 수줍은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진 이상한 합창이 택시 안에 울려 퍼졌다.
노래가 끝나자 기사님 말이 이어졌다.
이 노래 작곡자가 예민이라는 것, 이 작곡가가 지은 노래 중 '아에이오우'라는 예쁜 노래도 있다는 것 등등.
누가 지은 건지는 모르고 그저 노랫말이 너무 예쁘고 아이들 목소리가 사랑스러워서 좋아했던 곡인데, 그 기사님은 예민이라는 가수의 '찐팬'인 듯했다.
도로가 막힌 탓에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택시비를 지불한 뒤 차에서 내렸다.
택시 밖에는 일상이 흐르고 있었다.
저만치 멀어지는 택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잠시 꿈을 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택시 안에서 기사님과 함께 노래를 불렀던 기억을 떠올리니 슬그머니 웃음이 났다.
어찌 보면 좀 이상한 광경이었을 것이다.
생면부지의 두 사람이, 택시라는 좁은 공간에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함께 부르는 불가사의한 모습이라니...
내가 이 글을 어느 매거진에 올릴지 고민하다가 '웃음 한 꼬집'을 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덧붙임: 이 예쁜 노래 들어보세요.
https://youtu.be/lYtg86BXsFw?si=4XTDRaWHx0Cl6x7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