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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Jung Apr 03. 2022

삶과 죽음 - 나침반 #3

죽음과 행복의 상관관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정말 진지하게, 깊게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까봐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종교적으로 민감하게 여겨지는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각자의 믿음에 따라서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하지만 이 믿음이 부정당하면 우리는 두려움에 시달리며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 끝에는 생물 본연의 본능인 죽음에 대한 공포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그중에서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우리의 삶에 관한

정말 다양하고도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주기도 한다.


이 글에는 무교인 내가 종교적 관점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경건한 믿음을 지닌 독실한 종교인들은 조용히 뒤로 가기를 눌러주기 바란다.




-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죽음에 대한 관점은 정말 다양하게 있다.

하지만 공통점으로는 과학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인간인 이상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이다.

육체의 노화를 막지 못해서 늙어 죽는다거나, 불치병에 걸려서 죽기도 하고,

차에 치여서 죽고, 칼에 찔려서 죽고, 총에 맞아서 죽고, 심장마비로 죽고,

심지어 불운하게도 그냥 넘어져서 죽기도 한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죽기 쉬운 생물인 것이다.

과학적으로는 그냥 영원히 나라는 생명체가 활동을 멈춘 것이고,

기독교적으로는 천국이나 지옥에 간 것이고,

불교적으로는 환생이나 해탈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공통점은 더 이상 현실의 삶을 같은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나'를 잃게 되고, 내 주변의 친구, 연인, 가족, 동료 등

나와 연결되어 있는 환경을 잃게 되는 것이다.




- 기독교적 관점

  기독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죽어서 천국에 가면 좋을 것이다.

그곳에는 고통도, 다툼도 없이 오로지 평화로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살아생전 함께했던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아직 살아있는 그들을 지켜보며,

그들이 같은 천국으로 올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도와줄 수 없다.

그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신께서 그들에게 내려준 시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련을 버티지 못해 그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여 지옥에 가기라도 한다면,

더 이상 서로가 만나는 것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여전히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는데 말이다.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옥으로 따라가서 함께 지옥 생활을 겪게 되면 좋았던 사람도 원망하게 될 것이다.

  결국 천국에 가서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혼자서 행복해지거나, 지옥에서 고통받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러니 다 같이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모두가 하느님만을 믿고 따라 살며, 천국에 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 자체가 모순적이다.




- 불교적 관점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죽으면 환생이나 해탈을 한다.

환생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기억을 잃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초기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업보라는 개념이 있어서 이를 통해 전생에서 풀지 못한 잘못과 문제들을 하나씩 줄여간다.

전생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다음 생에서 다시 겪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이 없기 때문에 전생에서 얻었던 깨달음을 다시 깨달아야 하며,

깨닫지 못하면 결국 다시 문제를 만들게 되고,

그것을 풀지 못하면 다시 죽어서 환생하기를 무한히 반복해야 한다.

  그 윤회의 굴레를 끊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깨달아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데,

해탈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본연의 모든 욕망과 미련을 놓아야 하며,

이게 사람인지, 사람 형상을 한 돌인지 모를 정도로 세상과의 연을 끊고 수행에 정진해야 한다.

  결국 해탈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부처가 된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행복을 찾는 우리에게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 과학적 관점

  과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뇌의 활동에 의해 전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작은 세포들의 군집체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고 스스로 분열을 반복하며 나를 복제한다.

  그러나 시간이 점차 흐르면서 분열과 복제가 느려지기 시작한다. 노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분열과 복제가 불가능해지고 하나둘씩 신체의 감각 기관이 정지하게 된다.

모든 기관이 멈추게 되고, 뇌의 전기적 신호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체세포를 무한히 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이지만,

아직까지 현대의 과학기술로는 실현이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결국 우리의 체세포는 복제를 하지 못해 활동을 정지할 것이고,

부패가 진행이 되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입자들로 분해되어 대기 중으로 산화할 것이다.

더 이상 나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철학적 관점

  작게 보면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크게 보면 10년 전의 과거와 지금,

그리고 10년 후의 미래의 나는 모두 다르다.

  1 더하기 1도 모르던 내가 다음날 그것을 알게 되면, 어제와 오늘의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달라진다.

10년 전의 나는 키도 작고 어린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직장을 다니고 있다.

10년 뒤에는 나만의 사업을 꾸리고 또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이 순간의 차이를 삶과 죽음으로 나눌 수 있다.

덧셈을 모르던 내가 죽고, 곱셈을 배우고자 하는 내가 살아간다.

어린 학생이었던 내가 죽고, 직장 생활을 하는 내가 살아간다.

  즉, 현재가 과거가 되는 순간 기존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미래를 향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죽어가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나로 거듭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인지하고 생각하는 나는 항상 존재한다.

그렇기에 철학적으로 죽음이란, 우리가 변화하지 못하는 상태임과 동시에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할 때 우리는 죽음을 겪는 것이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우리가 잠에 들고, 아무런 꿈조차 꾸지 않을 때,

우리 스스로에게는 이것이 죽은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면 어제의 기억을 가지고 오늘을 이어서 살아간다.

현실은 내가 자고 일어나면 변화가 일어나 있고 그 변화에 적응하며 연속적인 삶을 살아간다.

  즉, 모든 연속성 있는 나의 인지 자체가 나의 생명과 삶이며,

그 연속성이 끊기는 순간 우리는 죽는 것이다.




- 삶의 모든 순간들은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겪는 대부분의 경험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태어나서 살아가는 과정을 그저 당연하게 여기며 오히려 많은 것들에 불만을 표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바꿔서 바라보면 당연한 순간은 하나도 없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들어보면 많은 사람들이 황당하기도, 안타깝기도 하는 안 좋은 일들을 겪는다.

어느 날 잠에 들었는데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다음 날 아침 고인이 되거나,

산책 겸 그냥 걷고 있는데 다리가 꼬여 넘어져서 뇌진탕으로 식물인간이 된다거나 등

언제 어디서 죽게 될지, 사고가 발생할지 모른다.

  이것을 잘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 또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잘못될지 모른다는 것이며,

일어나고 있는 동안 그것을 최대한 즐기며 감사해하고, 잘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루가 시작되고 아침에 등교 혹은 출근을 하고 가족들과 헤어진다.

그리고 힘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이 반겨준다.

그런데 집에 돌아올 수 있고,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들도 나름의 활동을 하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잘못될지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비단 가족뿐만이 아니다.

직장 동료, 친구, 연인 등의 다른 소중한 사람들도 그렇고, 내가 지금 즐기고 있는 취미,

하고 있는 일 등 삶의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갑작스레 잘못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잘못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들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면,

언젠가 관리에 소홀해져 그것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쉽게 가도록 살짝 농담을 섞어 비유를 해보겠다.

자, 우리의 눈앞에 맛있는 반찬이 하나 놓여있다고 하자.

우리는 반찬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들어 반찬을 집는다.

그런데 그렇게 입으로 가져가던 반찬이, 그만 손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오염되어 버렸다.

우리는 반찬을 먹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며 할 수 없이 그것을 버린다.

이제 그 반찬은 우리의 눈앞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반찬은 그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져서(탄생),

우리들의 식탁에 오르는 과정을 겪고(삶), 오염되어 버려짐(죽음)을 겪었다.

  반찬의 관점에서는 아무런 인지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의 관점에 의해서 반찬은 생을 부여받고 죽음을 겪었으며, 우리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 가는 것이다.

우리는 방금 반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우리의 세상에 반찬을 창조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실의 현상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의 관점을 정함에 따라서 무엇을 나의 세상에 창조할지, 아닐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삶의 자유의지이다.

그러니 부정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불행한 세상을 창조하기를 멈추고,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거나,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서 행복한 세상을 창조하기 시작해보자.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죽음의 다양한 관점을 이해해야 한다
삶의 모든 순간들은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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