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빈빈서 Dec 30. 2021

잉글랜드와 축구의 동시성장

[누구보다 스포츠 애호가가 되고싶다] - ①

스포츠는 즐거움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을 얻기 위해 스포츠를 찾아간다. 그들은 직접 스포츠를 하거나, 본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는 하나의 거대한 문화다. 문화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발전과 연관된다. 그렇기 때문에 스포츠도 한 사회의 발전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축구가 세계적인 스포츠가 되는 과정에는 영국 산업의 발전이 있었다.



잉글랜드의 축구 '붐'


축구는 19세기의 마지막 25년 간 잉글랜드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인기 있는 여가활동이었다. 축구 '붐'은 놀랄만한 규모로 일어났다. 1871년 FA 소속 클럽은 50개에 불과했지만 17년 뒤 1000개, 그리고 1905년에는 1만 개에 이르렀다. 리그 시스템이 정비되었고, 관중 수도 덩달아 급증했다. 1872년 FA컵 첫 결승의 관중은 2천 명이었는데, 1897년에는 6만 6천 명이 경기장을 찾았다. 1901년 토트넘 훗스퍼와 셰필드 유나이티드 간의 결승전에는 최초로 10만 명 이상의 관중이 찾아왔다.


이후 축구는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축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들이 존재한다. 이탈리아, 로마제국, 고대 중국까지도 축구와 유사한 형태의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축구'의 종주국이 잉글랜드라는 데 이견은 없다.


1864년, 런던 중심부의 프리메이슨 테이번이라는 술집에서 세계 최초의 축구협회인 'the Football Association'이 탄생했다. 런던 축구 클럽과 학교 축구부 관계자들이 모여 만든 협회였다. 이들은 축구와 관련된 13개의 조항을 만들었는데, 축구장의 최대 크기와 골대의 규격 등 대부분이 현대축구에도 적용되고 있다. 이후로도 잉글랜드의 축구협회는 이러한 전통성을 인정받아 'English Football Association'이 아닌 'the Football Association'이라는 명칭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축구의 시발점이 잉글랜드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 공식 홈페이지



산업혁명과 축구


위에서 언급한 폭발적인 축구 관중의 증가는 엄청난 인구 증가를 배경으로 했다. 18세기 중반, 잉글랜드는 산업혁명을 통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리고 이와 맞물려 19세기 중반부터 잉글랜드의 인구는 급증했고, 도시는 재조직되었다. 1800년 무렵 인구 10만이 넘는 도시는 런던 뿐이었지만, 1851년에는 10개를 넘어섰고, 1911년에는 36개가 되었다. 미들즈브러의 경우 마을이 1830년 형성되었고, 1851년 인구는 7천 명이었다. 그러나 석탄과 철강 사업의 엄청난 성장으로 1900년에는 인구 10만을 넘었다. 생긴 지 70년 만에 대도시가 된 것이다.


이러한 잉글랜드의 발전에 따라 '여가'를 누리는 새로운 계층이 나타났다. 19세기 전반까지 매우 힘들었던 노동자들의 생활조건이 19세기 중반부터 나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다수 산업 분야에서 토요일 오후 휴무를 쟁취해냈고, 1860년대부터 노동조합은 임금 인상을 얻어냈다. 이는 노동자들에게 여가를 보낼 여유를 주었다. 노동자들이 축구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잉글랜드 북부 공업지대에서는 노동자들이 축구팀을 만들기 시작했고, 그중 뛰어난 실력의 일부 노동자들은 돈을 받으며 경기를 뛰기 시작했다. 프로 선수들이 등장한 것이다.


축구는 많은 비용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단조로운 공장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에게 재미를 주었다. 노동자들은 차차 축구를 관전하는 데 돈을 지불할 용의까지 가지게 되었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철도망 또한 상당 정도 구축되었기 때문에 저렴한 가격으로 원정경기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자신의 동네에만 머물러 있던 팬들이 원정 경기에 따라갈 수 있게 되면서 팬 문화가 더욱 활성화되었고, 참여 스포츠로서의 축구뿐 아니라 프로 스포츠 산업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에서 유럽 전역으로


축구의 인기는 잉글랜드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스위스계 영국인들이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만든 클럽은 지금의 '유벤투스'가 되었다. 이러한 영향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유벤투스는 종종 '유벤투스 투린'이라 불리는데, 투린은 토리노의 영국식 표현이다. 같은 리그의 'AC 밀란'도 영국인이 만든 클럽이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밀라노'의 영국식 표현인 '밀란'을 공식 클럽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AC 밀란 공식 홈페이지



스페인에서도 잉글랜드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아틀레틱 클럽'의 '아틀레틱'은 영국식 표현이다. '아틀레틱 클럽'은 잉글랜드 유학에서 돌아온 바스크인들이 만든 클럽이기 때문에 이러한 클럽명이 굳어졌다. 반면 스페인 구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스페인식 표현인 '아틀레티코'를 사용한다.


이처럼 잉글랜드의 성장은 축구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축구가 유럽에서 이와 같은 인기와 규모를 가지게 된 것은 시기적절한 사회의 변화가 있었던 덕분인 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