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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Mar 04. 2022

공포

2022. 03. 03.

공포 영화를 볼 때 감상자가 느껴 마땅한 감정은 사실 분노인 것 같다. 공포 영화, 정확히는 스릴러 장르와 구별되는 의미에서 호러 장르에 묘사되는 괴물과 귀신과 유령 등은 가해자다. 호러 필름은 감상자가 피해자에게 이입하게 한다. 그때 영화 속의 정황이 피해자를 근본적으로 무력하게 만든다고 해서 분노가 차단되고 공포가 발생한다는 식의 설명은 불충분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말해 감상자는 영화 속 인물과 달리 최고로 강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 속 인물들이 처한 난관에서 축출되어 있다. 오직 한 방향으로 흐르는 재앙의 시간이 스크린에 가두어짐으로써 감상자는 한 토막의 정지된 시간을 선사받는다. 장르 원칙에 충실한 호러 필름은 감상 시간의 앞뒤로 뻗지 않는다. 삶의 직선에서 가상적으로 분리된 선분 역할을 한다. 정확히 그런 분리의 경험이 필요할 때 우린 호러 필름을 찾는다. 그것이 남기는 충격적인 잔상조차도 결국 잔상일 뿐이다. 호러 이미지들은 객석에서 빠져나온 자의 일상이 지닌 실제성을 강조하며 그를 특정한 사회적 좌표에 안착시킨다. 괴물과 귀신과 유령에게는 스크린 바깥의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기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상적인 호러는 유미주의다.


살인마는 부당하게 살인한다. 악마는 이해할 수도 없고 심지어 알려지지도 않은 이유로 악의를 품고 인간을 롭힌다. 같은 일을 다른 장르의 인물(설령 악마더라도)이 할 땐 분노가 느껴진다. 당장 내가 들어가서 사태를 바로잡고 싶다고 느낀다. 반면 호러의 문법에선 공포를 유발하는 다른 표현 수단이 활용된다. 기괴하게 그려진 악마나 음산한 음악 등 감각적 요소들은 호러에 자족적이지 않다. 결국 호러는 관찰자인 우리 자신이 인물들을 통해 과잉으로 드러나 있음의 문제다. 누군가의 죽음, 그 밑바닥으로부터 귀신이 솟아오른다. 귀신의 보이지 않는 몸이 컵을 깬다. 십자가를 태운다. 신뢰받던 사람을 미치게 한다. 마침내 나를 세게 때린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망자의 몸은 이제 궁극적인 몸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죽음을 동력 삼아 움직이는, 기계로서의 귀신이 살아 있는 자의 삶에 난입하는 것이다. 그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오직 극단적으로 자연적인 존재다. 시공간에 매개된 산 자의 몸이야말로 자연으로부터 내쫓겨 있는 듯하다. 귀신은 크나큰 원한을 품고, 한 자리에 머물며, '미디어'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규칙대로의 시공간을 세운다. 인간은 망각하지만 귀신은 망각하지 않는다. 귀신은 시간이 제거된 논리 체계로써 완전한 정념을 지닌 존재다. 그는 일말의 불안감 없이 자기애를 한다. 그는 유성처럼, 상상적인 우주의 인과에 어떤 유성이 남긴 흔적처럼 영원히 새겨진다. 그는 디지털이다....... 이런 특성으로 미루어보건대, 귀신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으로 요약될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적어도 우리네 인간 자신의 존재론적 일부다. 그는 인간 안에서 인간에게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너와 무관하다.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는다."


영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는 호러의 성질로 직진한다. 여기서는 인물들의 죽음을 통해 신체의 기계성 내지는 의식이 포괄하지 못한다고 가정되는 물리적 측면이 폭로된다. 그 잔인하고 자극적이기로 유명한 장면들의 목적이 그것이다. 그런데 정말 폭로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신체의 이러저러한 '진실'이 아니다. 일종의 장르적 에너지가 거기 작용하고 있음이 폭로될 따름이다. 너는 호러 필름 속에 있다. 그렇게 인물을 향해 알려주는, 그럼으로써 그를 표현 수단으로 재발견하는 과정이 죽음이다. 인물을 죽이는 것은 그를 피 흘리게 하고 살점을 뜯어 놓는 사물들이 아니라 바로 그 피와 살점이다. 그것은 죽는 순간에 발견되는 타자고, "이들은 죽기 위해 여기에 모였다"라는 표어로서의 호러 원리 자체다. 따라서 원리상 호러 필름에서의 죽음은 모두 자살이다. 카메라의 시선이 그들의 몸 속에 흐른다. 때가 되면 시선은 안에서 터져나오며 그들을 창작된 세계 쪽으로 개방시킨다. 이로부터 소위 '고어' 탐닉에 대한 이해를 시도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침투적인 공포에 대한 대응이다. 조작된 죽음의 이미지에 천착하면서 감상자는 삶의 순수성을 구출한다. 이미지는 자극적일수록 유용하다. 그가 하려는 것은, 그 자신의 심리 상태에 가해지는 자극을 중심으로 시신(타자)을 형해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피투성이 고깃덩어리인 '나'는 나의 자기이해에 한결 통합되기 쉬워진다. 탈출을 향해 내달리는 몰입인 셈이다. 많은 경우 그 몰입을 선호하는 이들은, 친밀하지 않은 생김새나 훼손된 신체 등의 표지를 보다 바깥쪽에 전시한 인물일수록 웃기거나 '귀여운' 대상으로 파악하려 한다(살펴본 바 이런 반응은 소년기에 더 전형적이다). 공포 기계들은 모에화된다. 다시 말해, 그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어떤 관조적인 주체를 즐겁게 만들기 위한 프로그램에 따라 장르적 형틀에 끌어내려진 존재가 된다. 이때 호러는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어진 가짜 리얼리즘이 된다. 물론 실상은 반대다. 이미지의 충격이 방어기제로서 취향을 요청한다.


한편 조금 다른 유의 호러에 대해서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샤이닝>, <더 위치>, <유전> 등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이 카테고리는 나름의 계보와 전통과 문법을 갖추어가고 있다. 이 장르가 자주 받는 오해는, 이들 영화가 모종의 사회적 발언이나 보고(르포르타주)의 기능을 하기 위해 순수한 자극으로서의 호러성을 타협적으로 줄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영화들은 다른 방법으로 공포를 구축하고 있을 뿐이고, 그건 이른바 스릴러 필름의 접근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문제 삼는 것은 공포의 발생 자체다. 무엇을, 왜 두려워하는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공포스럽지 않은 작위의 세계는, 필연적이고, 다양하고, 어떤 면에서 온당한 공포들을 어떤 식으로 폐기처분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일을 그들 영화에서는 다룬다. 이 경우 영화는 감상자에게 방어를 요청하지 않고 감상자가 (마치 안으로부터 시선이 터져 나왔던 호러 필름 속 주인공들처럼) 개방될 것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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