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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Mar 06. 2022

청바지

2022. 03. 05.

청바지는 아이러니한 옷이다. 그것은 튼튼하고 오염에 강하다고 알려져 있고 또 그렇게 광고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명성을 얻어 온 청바지의 스토리야말로 청바지에게 있어 가장 견고한 부분이다. 튼튼하기로 치면 더 튼튼한 신소재가 있으므로 데님 원단은 단지 뻣뻣한 데에 가깝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염에 강하다는 통념은 한층 흥미로운데, 사실 평직 리넨을 비롯한 다른 원단들과 마찬가지로 데님 또한 얼마든지 오염되며, 단지 오염된 데님이 그것의 본성에 합치한다는 대중적 이해 때문에 그 오염이 시야에서 지워질 뿐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잘 알려진 복식사의 한 관문인 군복의 일상복화를 들 수 있다. 군복은 활동성이나 유용성만큼이나 획일화와 규율과 억압에 친숙한 의상이다. 반면 오늘날 퍼티그 팬츠, M-65 재킷, 헬멧백 등 전투 의상들은 시민적 역동성을 나타내는 데 쓰인다. 그것은 군 조직을 규정하는 집단주의적 결속과 구분되는 외향성의 힘이다. 군복 착용자는 (그가 분명하게 군인은 아니라는 데에 힘입어) 도시적 옷차림 속에 '숨어 있는' 이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한다. 이를테면 라운지 수트 위에 야전용 재킷을 걸치는 이른바 믹스 매치가 착용자를 경쾌한 분위기로 감싸는 건 바로 그 낙차 덕분이다. 실은 라운지 수트가 정복(dress)과 구별되는 일종의 활동복으로 태어났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런 구별 자체가 임의적인 것이며 무엇보다도 사후규정적이라는 의미에서 역사적 현상임이 명확해진다. 그러므로 20세기 중반 갓 전역한 부랑자와 그의 친구 반전 활동가들이 역설적으로 전투복을 입었을 때, 그건 패션이 아니었다. 패션은 생활에 대해 침범적일 때 패션이다. 즉 패션은 적어도 한 겹의 외재화를 전제한다. 거리의 전투복이 그것에 정치적 기능을 주던 맥락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시작할 때, 새로운 판타지로서 비-판타지인 사회를 가리키게 된 순간에 그것은 패션이 되었다.


여기서 도출되는 내용은 이렇다. 맥락이 세부를 정당화한다는 것. 세부는 맥락을 결정하고, 맥락을 통해서만 세부는 그 필연성의 내용을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세부는 그 자신이 태어날 수밖에 없는 맥락을 제 안에 반영함으로써 맥락을 재맥락화한다는 것(뭐야? 낯설지 않은 전개다). 이 지점에서 다시 청바지 얘기로 돌아가, 빈티지 복식 애호가들이 푹 빠져 있는 청바지 해부의 미학을 참고해도 좋겠다. 청바지가 안티 패션의 아이템이라면 그건 청바지가 분명히 패션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칭 'blue blood'가 흐르지 않는 것 일체를 자기가 규정하는 생활세계 밖으로 민다. 이때 벌어지는 주요한 미학적 전도는, 사람들이 청바지의 내적 모순인 불용성의 측면을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가랑이 리벳과 셀비지와 질감의 작은 차이 등 청바지라는 사물에 있어 미규정적이었던 잉여의 부분이 청바지의 어떤 진정성을 가르는 지표가 된다. 에비스(Evisu) 등 복각 브랜드는 흩어진 세부를 그러모아 역사상 실재하지 않았던 청바지를 만들곤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청바지는 실용을 중심으로 통합된 역사를 그 통합성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고립시키는 정신, (대문자-)청바지로부터 유리된 것에 대해 도착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패션 정신을 새긴 작품으로 통한다.


예술로서 패션 디자인은 물론 창조적 행위지만, 순수한 시작과 혼동되어선 안 될 것 같다. 그건 구습과의 결별도 아니다. 구습에 적극적으로 다가선다는 의미에서 패션 디자인은 종결가깝다. 그 결과 디자이너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게 아니라 낡은 질서에 더 엄격한 질서를 부여한다. 따라서 패션 디자인을 순전히 재구성으로 파악하는 일 또한 얼마간 부당하다. 디자인은 구성물에 대한 선택적 접촉이고, 임의의 구성들을 (더불어 아이템이라는 표면상 구성의 지도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확실하게 한다. 이렇게 보면 오직 '트렌드'를 중심으로 패션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상당히 부정확하고 게으른 것이다. 그런 시각에패션은 이미 패배주의적인 틀이다. 패션 산업과 패션은 내통하는 것 이상으로 서로 반발하는 것이다. 패션 산업이 가속적인 사업성을 통해 자기를 이해하려고 하는 이상 패션은 그에 대한 응답으로만 읽히기 쉽다. 실제로는 패션의 불멸성에 대한 응답으로 유통이 발생하는데도 말이다. 가령 에코백은 그 본래 기획이 반상품주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광고판이자 전단지로서 오늘날 과잉 생산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내려앉음이 모욕적일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적어도 복잡한 실패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찌의 노골적인 로고백을 패셔너블하게 만든 그 도착증이 에코백에 대해서도 똑같이 할 수 있었다면, 사실상 에코백에 대해서는 누구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패션은 뜻밖에 과거지향적이다. 보다 공정하게 말해서, 패션은 오직 과거에 주어진 능력으로서의 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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