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3. 07.
미노루 야마사키가 이런 고민을 했든 하지 않았든 그에게 이런 고민을 부여해보자. 그가 해야만 하는 당위도 없었고 우리가 그를 뛰어넘어서 하는 고민도 아니다. 나에게 중요하게 생각되는 건 바로 야마사키 자신이 이런 고민을 생전에 했을 수도 있다는 전제다. 그러니까 반시대성이 비로소 동시대성이라는 생각을 어떤 인물의 가상성에 적용해서 비로소 그를 뚜렷하게 마주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는 이런 고민을 했다. 프루이트 아이고는 무너졌는가? 그것은 내 작품인가? 그것의 파괴는 내 작품인가? 내가 만든 정신의 작품인가? 정신은 작품인가? 정신을 누가 만들었는가? 프루이트 아이고가 무너질 때 모더니즘에 대한 조종이 울린 것인가? 역사는 파악될 수 있는 전체인가? 내가 모더니즘인가? 사람이 그런 큰 존재가 될 수 있는가? 한 사람(작품으로서의 사람)을 그런 큰 존재로 만듦으로써 사람들은 자기를 파악할 단초를 얻는가? 모더니즘은 행위자인가? 그가 프루이트 아이고에 대해 알았는가? 그가 뭘 알았겠는가? 내가 알았다고 한다면 나는 어디까지 행위자인가? 나는 언제까지 살아 있는가? 나는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을까? 그런 다음에야 내가 보일까? 누구에게 보일까? 미래에서 시간은 자기 혼자 뒤로 걷는가? 나와 함께 걷는가? 나는 신성을 되살리려 했는가? 아니면 앞서 가버린 신성을 붙잡으려 했는가? 나는 빌려온 존재인가? 미국인인가? 일본인으로 보이는가? 내 안의 일본인은 무너졌는가? 보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너무 많이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거기서 내가 떠오르는가? 나만 떠오르고 있는가? 태양 잘린 목인가? 정말로 내가 하는 표현인가? 표현은 대화에 참여하는가? 표현은 대화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가? 대화가 무너지면 그것 또한 재료가 되는가? 그렇다면 프루이트 아이고는 아직 살아 있는가? 거기에 사람이 사는가? 그는 갇혀 있는가? 갇힌 채로 행복한가? 아니, 행복이 모더니즘인가? 그는 이런 고민을 했다. 나중에 영원토록 다시 할 고민을 미리 해보는 것처럼. 그렇다면 지금 나를 부를 필요까지는 없었어. 라고 그는 말했다. 자신이 지금 나 있는 곳을 건축했느냐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