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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Apr 01. 2022

정직

2022. 03. 31.

"진실된 사람의 마음은 하늘에서 서리를 내리고 성을 무너뜨리며 금석 뚫을 수 있다. 하지만 허위로 가득한 사람은 형체만 헛되이 갖추었을 뿐 참됨은 이미 망했기 때문에 남을 대하면 얼굴이 가증스럽고 혼자 있으면 자기 모습과 그림자마저 스스로 부끄러워진다."


오래 전 친구가 알려준 채근담의 구절을 이후로 자주 떠올린다. 저런 말은 조금도 고루하지 않다. 부와 권력과 안전한 삶과 실용적인 자기 다스림에 관한 현대의 수많은 잠언이야말로 고루하다. 거기엔 이미 소진된 개인성이 깃들어 있다. 혼자 놓여 있음이라는 사태, 불가피한 그 진실이 버거울 때 사람은 절대적인 잣대를 요청한다. 오직 그것을 타인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다. 사회적인 것의 발생을 우열의 발생으로 한정하여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다. 그는 외로움을 압도적인 추월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달랜다. 힘이 있고 그 다음에 가족이 있음을 그는 받아들이고 또 기뻐하지만 정작 힘은 불명예한 추문이 된다. 힘은 추구됨과 동시에 영원히 후퇴하는 가치가 된다. 즉 힘을 둘러싼 자가당착이 발생한다. 그는 힘을 소유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의 환상을 완성하려면 실제로 그가 소유한 것은 힘이 아니라 힘의 불필요성이어야 한다. 조건과 규칙을 벗어나는 애정, 신성한 지지 기반이어야 한다.


따라서 무척 실용적인 이유로 오늘날 정직함은 강하게 의심받는 자질이 된다. 소유를 믿으면 거짓말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우리를 괴롭힌다. 소유가 사람끼리의 대화에 있어 가능한 하나뿐인 형식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 대화는 자기 안에 반드시 포함되어 있는 침묵의 존재와 능력을 부정함으로써만 계속된다. 이때 침묵은 다름 아닌 가족의 침묵이다. 누구에게 소유되거나 쟁취된 이미지로서의 가족이 아닌, 가족을 만드는 가족들. 서로 마주치는 가족들. 추월은 한 방향으로 최대한의 속력끼리 대결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족을 마주친다면 그건 적어도 두 방향의 달리기가 있었다는 뜻이다. 만약 사선으로 마주칠 수도 있다면 (그러니까 '나'와 '너'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방향까지 사람이 올 수 있는 방향으로 이해한다면) 달리기의 방향은 심지어 무한하다. 가족은 내가 이끌어서 결승점에 데려다 놓는 대상이 아니다. 가족을 다 잃었다고 생각할 때 다가오는 것들의 이름이다.


채근담의 저 구절은 여러 고사를 차용하고 있다. 거짓 고발로 옥살이를 하게 된 추연이 통곡하자 하늘이 충심에 감동하여 오뉴월에 서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때 하늘 너머에서 서리를 내려준 상상의 존재, 그가 바로 가족이다. 또 제나라 기량이 성을 공격하다가 전사했을 때 그의 부인이 마음의 고통을 호소하자 지나던 행인들도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이 스며들어 성이 무너졌다고 한다. 그때 눈물 흘리고 지나간 행인들이 바로 가족이다. 이들 옛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세계가 그리 앙상한 장소는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사람과 마주칠 때 그는 신으로 옴과 동시에 벌거벗고서 이름 없이 온다. 여름에 내리는 눈처럼, 이변처럼 한 사람이 올 때, 아무도 나를 몰라주더라도 그가 나를 안다는 것을 내가 알 수 있다. 그가 나를 안다는 것도, 심지어 내가 그를 안다는 것 내가 계획한 앎이 아니기 때문이다. 혼자 놓여 있음이란 나를 끊임없이 혼자로 돌려놓는 어떤 힘이 있다는 뜻이다. 채근담에서 진재(眞宰)로 표현한 게 바로 그것이며 현대에 통용되는 개념어로 말하자면 '주체'다. 예기치 못한 만남으로 일종의 오염을 감당할 때에만 우리가 비로소 주체일 수 있다는 건 언제 생각해도 힘이 되는 역설이다. 가족은 나를 혼자 되게 만든다. 가족은 운명공동체 따윈 없음을 증명한다. 우리가 정말 공동체라면 운명은 수천 수만 갈래의 가능성이어야 한다. 그 반대의 생각, 우리는 공동체니까 나의 성패가 만인의 성패를 결정지을 것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우리가 맞서야 할 대상이다. 그런 믿음 아래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만인에 대한 (갈수록 범위를 넓혀가는) 축출에 불과할 것이므로.


키케로는 로마의 시인 엔니우스와 나시카의 일화를 전한다.


나시카가 엔니우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의 하인이 나서서 엔니우스가 부재중임을 알렸다. 나시카는 엔니우스가 집에 있으면서 없는 척하는 것을 알고서 그냥 돌아갔다. 얼마 뒤 엔니우스가 나시카의 집을 방문했다. 그러자 이번엔 나시카가 "나시카는 집에 없다"고 답했다. 목소리를 알아본 엔니우스가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따지자 나시카가 오히려 화를 냈다. "지난번에 내가 너의 집에 갔을 때, 네가 집에 없다고 하는 하인의 말을 나는 그저 믿어주었다. 그런데 너는 내가 직접 나서서 집에 없다고 말하는데도 내 말을 안 믿느냐?"


이 일화는 정직함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만든다. 엔니우스와 나시카, 둘 중에 누가 더 신뢰할 만한 사람인가? 비록 실제로 저런 일을 당하는 입장에선 짜증이 날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무래도 나시카의 편이다. 그는 가장 급진적인 정직함으로 대응했다. 그는 거짓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엔니우스가 거짓말하는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그 거짓말이 거짓말인 채로 세상에서 제 역할을 지니게끔 놔두지 않았다. 이제 거짓은 자신의 공허한 원리를 드러내고 만다. 참과 거짓에 대한 경직된 분리 체계와 관성적이고 수동적인 반응들, 그 기저의 일관성이 없이 거짓은 성립하지 못한다. 나시카는 이렇게 주장하는 셈이다. 거짓말은 없다. 말이 존재할 뿐이다. 내가 말할 때 나는 언제나 나로서 말하는 것이다. 너도 네가 해야 할 말을 직접 하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말하는 것이 정직함일 수는 없다. 애초에 그런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소설 「빌더무트라는 이름의 사나이」는 '진실만 말한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일견 상식적인 입장을 보다 정교하게 풀어낸다. 소설 속 판사는 평생 진실된 재현의 문제에 골몰했지만 결국 지성과 말의 한계에 좌절한다. 그는 '있는 그대로'라는 것이 정말로 있고, 그것을 우리가 표현하는 과정에 참 혹은 거짓 따위를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전제를 따르면 이런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세계의 '있는 그대로'에 나의 말이 결코 닿을 수 없다면, 결국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에 불과하다. 생각하는 그대로를 말한다는 건 둘 중 하나다. 생각을 거짓된(거짓일 수밖에 없는) 세계에 맞추었거나 말을 근거 없는 생각에 맞춘 것이다." 그러므로 전제가 바뀌어야 한다. 생각은 세계의 일부다. 위의 일화 속에서, 나시카는 생각이 언제나 이미 말해진 것이라고 믿고 행동했다. 생각은 말로부터 격리되는 속내 따위가 아니다. 말과 마찬가지로 실재하고, 반응하고, 움직이는 것, 사람이 움직이고 또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다.


정직은 실로 사회적인 덕목이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먼저 태어난다. 정직함이란 진실이 나에게 감추어져 있지 않다는 믿음이다. 스스로가 진실을 감추고 있지 않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은 반드시 배반당한다. 정직은 성취되지 않는 덕목이다. 세계는 자기 민낯을 절대로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의 민낯을 마주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진실을 둘러싸고 경합하고 더 진실되고자 하는 애씀이 가능하다고 말할 때, 사실상 우리는 마주치지 못한 것을 어떻게든 표기하고 있는 셈이다.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나는 네가 무엇인지 몰랐다.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앎이라고는 네가 무엇인지 결코 알아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너는 이 세상에게 무엇이 되어간다는 것. 그래서 내 생각에 모든 거짓말의 기본형은 이것이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거짓말의 금지도 정직함일 수는 없다. 정직은 금기의 덕목이기보단 충실의 덕목일 것이다. 여전히 나는 자신 없고 무섭다. 금기를 어기면 후회 속에서 죽어가지만, 결단에 대해 충실하지 않으면 후회 속에서 살게 된다는 것. 그것을 거듭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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