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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Apr 06. 2022

유언

2022. 04. 06.

사람은 언제까지 살아 있는가?


지금 결심을 해본다. 이를테면, 나는 나의 장례식에 어떤 관여도 하지 않겠다고.


유언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다른 모든 기록과 기억이 그러하듯이 유언은 한 사람의 의지를 지속시키지만, 그를 둘러싼 관계 전체를 지속시킴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거기서부턴 모든 게 가소성이다. 죽음은 사람을 물화한다. 그런데 사람이 언제나 이미 물화된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이르면 묘해진다. 다만 그는 공용어가 된 것이다. 누군가를 말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그 언어로 짠 이야기 속에서 죽은 자는 재료로서 자신에게 매번 돌아온다. 물론 그가 돌아옴에 따라 뒤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앞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죽음은 삶 속에 처음으로 발생한 방향이다. 이때 유의할 점은, 죽음을 길잡이로 삼는 건 오직 산 사람들의 몫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사건이라는 개념의 시공간적 조건들 때문에 죽음은 죽은 자의 사건일 수 없다. (프랑스인들 사이에 특히)잘 알려진 것처럼, 죽음은 오로지 살아남은 자들의 사건이다. 죽음은 한 사람의 부재를 나머지 사람들에게 돌려준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언제나 그 나머지에 속한다. 삶의 무대를 지탱하는 주체들의 입장에서 이 조건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살아서, 나는 엑스트라다. 죽어서, 나는 사건이다. 이것이 우리가 죽은 이를 두고 관행적으로 하는 말, 자연으로, 땅으로, 흙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말이 나타내는 바다. 그는 맨땅로부터 우리를 조금 띄워 놓는다. 그가 우리에게 주어진 한 겹의 간격이 됨으로써, 멀어짐 자체가 됨으로써. 삶은 종종 예술품으로 상상된다. 그러나 이 예술품이 실존한다는 것은 하나의 예술적 행위가 끝났다는 뜻이다. "사랑이 끝나면 우리는 법 앞에 서 있다". 삶이 끝나면 우리는 사람들 앞에 서 있다. 우리가 전 생애에 걸쳐 세공한 삶이 단 한 번도 세공되지 않은 어떤 것으로 놓인다. 죽음은 삶을 양식화한다. 분석과 패러디를 가동시킨다. 한 장의 종이, 인장이 찍힌 서류들, 마지막 고백과 해소의 순간을 향해 줄 지어 빨려들어가던 사건들은, 이제 별개의 사건들에 사용되고 또 성장하는 조각이 된다. 단일한 예술품이라는 이념의 완성은 끝없이 뒤로 미루어진다. 이것이 유언이 지닌 가능성의 전부다. 말은 지속도 완성도 되지 않으면서 지속과 완성을 향한 꿈 속에 섞여든다. 이로써 망자는 아직 살아 있는 작가들(유언의 창작자들)이 파악해야 하는 것, 배제되어 있는 것, 그러므로 항상 새로이 파악될 여지가 있는 것, 즉 현실이 된다.


죽은 사람들 중에 시라스 지로라는 일본 사람이 있다. 부유하게 자라서 고등교육을 받고 2차 세계대전 전후 외교 활동과 기업 운영으로 명예를 얻은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지 말고 계명(망자에게 부여하는 불교식 이름)도 받지 말기를 유족에게 주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족은 그의 말대로 했다. 사회적 관습보다 그를 더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때 존중했다는 것은 엄연히 말해 그의 애도를 존중했다는 것이다. 장례는 필요 없고 계명은 불허한다, 말하면서 그는 벌써 죽은 자신에 대해 애도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장에 홀로 앞질러 가 있었다. 그 자신이 출입을 차단하여 아무도 문상할 수 없게 된 그곳에. 한편 시라스 지로는 일본에서 최초로 청바지를 입은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굉장한 멋쟁이였다. 일본 사회는 그의 멋을 존중했다. 그래서 그가 제 삶에 마지막으로 영구히 남기려 애쓴 그 패셔너블한 족적을 (주로 관습으로 나타나는) 사회의 자기이해 속에 똑같이 남겨주었다. 다시 말해, 그의 자기 애도를 사회적으로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다. 오늘날 그는 전후 '개화'기의 실용주의적 정신의 화신처럼 회고된다.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을 경유하여 인기를 얻은 대표적인 인물로 조조가 있다. 그 역시 장례를 간소화하여 유족으로 하여금 정복전쟁 사업에 빠르게 복귀할 것을 요청했다. 간웅은 옛날 같은 오명이 아니다. 그는 전근대 사회에서 일찍부터 실익을 추구한, 자본주의적이고 능력주의적인 이념의 선구자로 현대의 대중문화에 재소환된다. 이런 상황이 조조나 시라스 지로와 같은 개인의 승리와 영달로 손쉽게 요약될 수는 없다. 망자의 지위가 이처럼 움직인다는 건 아직 지위가 들어설 자리가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 아직 산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이 계속 변화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망자를 그들 틈에 기용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장례는 특권화를 중심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결코 특권적인 것에 진짜 특권을 주지는 않는다. 유언을 남길 때, 그 유언이 사회적 힘을 지닐 것이라고 기대할 때, 발화자는 적어도 어떤 거대한 멈춤을 상정한다. 요컨대 화자는 반복하고 청중은 멈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례는 멈춘 적이 없다. 유언이 타인에게서 감추어져 있는 동안에만 유언은 결론일 수 있다. 어떤 이해도, 오해도 불가능한 그 상태를 벗어나는 즉시 유언은 채집된다. 발췌된다. 그리고 최초의 한 사람이 죽은 이래 멈추거나 끝난 적이 없는 이 기나긴 장례의 독경 속 한 구절이 된다. 이런 생각의 틀을 개인의 삶에 적용하면 뜻밖에 감지되는 게 있다. 바로 삶의 전 과정이 자신에 대한 긴 애도와 다름 없다는 것이다. 죽은 뒤에 나의 죽음은 남아 있는 이들에게 속하며, 그들은 나의 삶과 말 전체를 평등하게 인용하여서만 나를 추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언은 말의 끝이 아니다. 최대한으로 망상해봤자 유언은 말의 한쪽 끝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실수를 한 셈이다. 나는 나의 장례식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함으로써 나의 자율을 특권화했다. 나는 나의 장례식에 관여할 수밖에 없다. 남은 이들이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서 내가 무슨 입장을 표명하더라도, 어느 경우에든 그들은 같은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내가 그들에게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나의 관여이고 최선이다. 사람들은 매일 자신의 자유와 싸운다. 죽은 사람 정도는 함께 싸우고 있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물론 나도 그런 순진한, 사랑받는 꿈을, '당신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말이 나에게도 필요하다'는 말을 듣는 꿈을 꾼다. 그럴 땐 나도 자신에게 변명을 해볼 수 있다. 말한 자에게 속한 것처럼 여겨지는 그 말이 내포한 사회적 힘은 사실 듣는 자에게 속해 있고, 더 정확히는 그가 들은 것을 다시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에 속하는 것이라고. 그럼에도 그에게 '딱 하나뿐인 소중한 말'을 남길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좋은 도피처가 있다. 이건 너무나도 유용한 꼼수여서, 나는 어떤 종류의 글을 쓸 때에든 앞에 펼쳐진 여백에다가 이 문장을 투명하게 써놓고 시작한다.


내 유언은 비밀이다. 그것을 네가 듣게 될 일은 영원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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