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대로 동행 Sep 21. 2024

시어머니의 글쓰기

모든 것은 사라지기에

시어머님은 우리 집에서 도보로 불과 10분 거리에 사신다. 3년 전 혈관 수술 이후 1년간의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 홀로 남으신 어머님의 유일한 낙은 집 앞 노인 복지관에 다니시는 것이다.


이번에 추석 명절을 맞아 명절 하루 전날 어머님 집에서 음식을 장만한 뒤 소파에 앉아 한숨 돌리는 중에 어머님이 슬며시 내 옆에 와서 앉으셨다.


"너, 아직도 글 쓰냐?"

어머님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써서 몇 번 카톡으로 보내드렸는데 그걸 기억하셨는지 나에게 슬며시 물어보신다. 어머님에 대해 썼던 글을 카톡으로 받아 보시고 밤새 읽고 또 읽으며 좋아하셨다는 남편 얘기를 들었었다.


그런 어머님이 갑자기 글을 쓰냐고 물으셔서 나는 풀 죽은 소리로 대답했다.

"에휴, 요즘은 애들 수업에 수험생 뒷바라지에 여러모로 경황이 없어 글을 자주 못쓰네요. 이제부터라도 좀 써야 할 텐데.... 근데 왜요?"

나의 물음에 어머님은 씩 웃으시며 품 안에 소중히 안고 계셨던 당신의 노트를 내놓으셨다.


요즘 노인 복지관에 다니며 색칠 공부 하신다고 매일 노트를 끼고 살다시피 하셔서 당신이 색칠한 작품을 보여 주시려나  고개를 돌려 봤다.


"너, 내가 쓴 글 한 번 읽어볼래? 내가 이번에 노인 복지관에서 글을 써보라 해서 써봤는데...."


선생님께 숙제를 내놓으며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낯선  노트를 내미시는 어머님. 노트를 펼치자 한 자 한 자 꼭 꼭 눌러 정성스레 쓴 글이 한눈에 들어왔다.


양 면 가득히 채운 정갈한 글씨를 보며 탄성을 내지르는 나를 향해 어머님은 작정한 듯 자신의 글을 읽어보겠다고 나서셨다.


"제목은 한 맺힌 우물 안 개구리다. 한 번 들어봐라. "

며느리 앞에 노트를 자랑스레 펼쳐 놓으신 어머님은 당신이 쓰신 글을 직접  낭랑하게 읽기 시작하셨다. 읽으면서 스스로도 감정에 복받치셨는지 가끔씩은 숨을 고르며 쉬어 가셨다.


운동화가 들어간 문장에서는 나에게 고개를 돌려 요즘과는 다른 그 시절의 운동화를 설명해 주셨다.  


70여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당신의 글을 읽으며 어머님은 어느새 전쟁 후 학업의 꿈을 내려놓아야 했던 어린 단발머리 소녀로 돌아가 울먹이고 계셨다.



"어머님, 저도 가슴이 뭉클하네요. 얼마나 슬프셨어요..... 앞으로도 계속 글 써주세요. 어머님이 써놓지 않으시면 다 사라지잖아요. 이렇게 기록하셔야 우리가 기억하고 추억하지요."


며느리의 격려에 한껏 힘을 얻은 어머님은

"그럴까? 앞으로도 계속 써볼까?" 하면서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어떤 영속적인 순간들, 어떤  사람들, 어떤 날들을 제외하곤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제임스 셜터-


사라지는 순간을 붙들기 위한  집요한 몸부림, 글쓰기.

어머님의 이 몸부림이 오랫동안 계속되길 속으로 기원해 본다.


어떤 글은 삶 그 자체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프니까 보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