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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찬란한 지랄이라니

'이 지랄 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고

by 그대로 동행

이 책이 처음 세상이 나온 건 작년 3월이었다. 그런데 벌써 17쇄를 찍었단다. 무서운 기세이다.


책의 저자인 조승리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신문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서였다. 시각장애인인 그녀는 장애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해사한 표정과 맑은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했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의 세 번째 책이자 첫 소설집인 '나의 어린 어둠'에 대해 얘기했다. 15세에 시각을 잃게 되는 병을 선고받은 이후 그녀는 하나씩 상실하는 삶을 살았다. 시력을 잃었고, 엄마를 잃었다. 친구를 잃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가장 어두운 곳의 이야기를 밝은 곳에 꺼내놓는 게 내 글쓰기의 사명'이라는 그녀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그녀에 대해 궁금해지고, 잘 알고 싶어 첫 저서인 이 책을 구입했다.


책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엄마를 비롯한 가족들, 안마사를 하며 만났던 사람들, 활동보호사부터 가까운 친구들까지 그녀를 거쳐간 사람들의 얘기가 묵직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며 나는 앞이 안 보이고 나보다 어린 그녀가 훨씬 더 세상을 예민하고 넓게 바라보고, 깊이 사유, 통찰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훤칠한 그녀의 글 앞에서 바짝 졸았다는 시인 이병률의 추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이해되었다.


누가 봐도 슬픈 얘기이지만 그녀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 담담함으로 인해 애잔함이 짙어진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삶을 향한 그녀의 의욕과 열정은 활활 불타오른다.


수많은 거절을 물리치고 기어코 선생님을 졸라 탱고를 배우고, 남들이 만류하는 해외여행길에 올라 타이베이를 다녀왔다. 보이지 않는 그녀를 향한 친절한 손길들의 도움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물론 '저런 사람들', "앞도 안 보이는데 뭐 하러 여행을 왔냐'는 사람들의 날 선 시선과 말의 폭력도 언급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글은 자신이 받은 친절과 사랑에 더 많이 할애돼 있다.


그래서 그녀의 에세이들은 상처와 패배로 끝나지 않고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과 사랑의 의지로 끝을 맺는다. 그 메시지들이 읽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어루만진다. 나도 해냈으니 너도 할 수 있다고 속삭여 주는 것만 같다.


'나는 그동안 실패가 두려워 장애를 핑계 삼아하고 싶은 일들을 포기해 왔다. 잃어버린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다르게 살려 노력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일로 만들기 위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용기를 낸다. 탱고 수업은 내게 첫 도전의 시작이었고 내 가슴에 열정을 심어 주었다.'

'수미 씨는 장애가 불행의 원인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눈이 먼 게 불행한 게 아니라 이 상태로 영원히 살아가야 한다는 게 진짜 불행이라고 말했다. '


지독한 가난과 불행, 의지하던 엄마로부터 받았던 상처와 그 엄마의 죽음, 중학생 시절부터 어려운 가정형편을 감안해 꿈이 경리였을 정도로 그녀는 일찍 여물어 버렸다.


그렇기에 그녀의 글들도 성숙하고 농익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이 정도로 느끼고 배려할 수 있는지 경탄하게 만든다.


타이베이를 여행하고 온 뒤, 그녀는 '행복은 바라는 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의지로 맺는 열매 같은 것이라는 걸 나는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라고 고백했다. 그 열매를 맺기 위한 그녀의 여행이 이후로도 계속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녀의 책을 읽으며 편협했던 나의 시각이 한층 넓고 웅대해졌다. 나만 힘든 게 아님을, 누구의 삶이나 힘들고 버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묵묵히 각자의 몫을 살아가는 것. 거기에 인생의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거친 운명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헤매며 신나는 일을 찾는다는 조승리.


그녀는 자신의 꿈을 찾다 길을 잃어 방황하는

한 고객에게 말한다.

"나도 글을 써요. 10대 때는 최고의 유작을 한 편 남기고 서른 살 전에 요절하는 게 내 꿈이었어요. 그런데 서른을 넘기면서 꿈을 정정했어요. 내 꿈은 무병장수예요. 누가 봐도 호상이라고 할 때까지 살면서 글을 계속 쓰는 게 내 꿈이고 목표예요."


그녀의 꿈이 바뀌어서 다행이다. 씩씩하고 기특한 그녀의 글들을 더 오래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니.

아무래도 나는 조승리에게 홀딱 반한 것 같다.


삶이 힘들어서 주저앉을 고비에 만난 그녀의 책.

마치 나에게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삶이라고,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고 손 내밀어 주는 것 같다.


마지막 에세이 '비극으로 끝날 줄 알았지'의 마지막 문장

'나의 새로운 장래희망은 한 떨기의 꽃이다. 비극을 양분으로 가장 단단한 뿌리를 뻗고, 비바람에도 결코 휘어지지 않는 단단한 줄기를 하늘로 향해야지. 그리고 세상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품은 꽃송이가 되어 기뻐하는 이의 품에, 슬퍼하는 이의 가슴에 안겨 함께 흔들려야지.


그 혹은 그녀가 내 향기를 맡고 잠시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내 비극의 끝은 사건의 지평선으로 남을 것이다.'


나에게 사건의 지평선으로 남은 그녀의 축제.

이토록 찬란한 지랄이 언제까지고 계속되면 좋겠다.


수십 년 동안 수필을 써오신 글쓰기 선생님이 수업 때 '시궁 이후공론'을 말씀하셨다. 고통 뒤에 좋은 글이 나온다는 뜻이란다. 선생님은 자신의 가난과 결핍으로 인해 작가가 될 용기를 냈노라 고백하셨다.


그녀의 책을 덮으며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눈앞의 생이 힘겨워 진통제처럼 찾은 그녀의 문장들을 통해 잠시 숨을 돌렸다.

여전히 산다는 건 힘겨운 일이지만 나의 통증도 언젠가 이런 다정한 위로가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어본다.


그래서 나도 그녀의 글 앞에서 바짝 쫄았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어졌다.

이토록 찬란한 지랄을 오래도록 감상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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