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노스(chronos)의 시간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의 개념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두 갈래로 나누어 인식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크로노스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흐르는 정량적 시간, 즉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객관적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는 순간의 중요성과 기회를 중시하는 정성적 시간으로, 개인의 의지와 선택이 반영된 자의적 시간이다.
이러한 유한한 삶의 시간은 "죽음을 기억하라, 혹은 사라짐을 잊지 말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맞닿아 수많은 예술 작품에 영감을 주어왔다.
사진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나타남”과 “사라짐”의 의미로 구현된다. 사진의 본질인 “말하기”를 통해 “존재와 부재의 증명”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부재의 증명을 위해 존재했음의 흔적을 남겨왔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의 기간을 묘비석에 새김으로써 지금은 부재하나 그때는 존재했음을 기록으로 남겨왔다.
사진평론가 진동선은 그의 저서 ⌜사진 기호학⌟에서 “일대기 혹은 연대기라고 부르는 것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시각과 시각 사이의 경과 지표이고, 또 시간과 시간 사이의 틈과 간극의 지속을 통해서 시간을 증명하는 시간의 모습이다. 이 같은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죽은 자의 묘비이다.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다’라는 시간의 경과 지표를 묘비명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다. 이것이 크로노스의 시간이다”라고 했다.
이렇듯 묘비에 새겨진 부재자의 기록과 낡은 석물(石物)들은 시간의 경과를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인 것이다.
이번 헝가리 여행에서는 존재자(存在者)들의 삶의 포즈와 그 공간 속의 사물들, 그리고 부다페스트 피우메이 공원묘지 부재자(不在者)들의 크로노스의 시간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작업을 했다. 그리고, 작업과정에서 사진의 시간성에 집중하기 위해 흑백 필름을 선택했다. 색의 정보가 배제된 흑백 필름은 형태, 빛, 강한 대비, 그리고 풍부한 계조를 통해 주제에 더 집중하게 하고, 깊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하여 촬영, 현상, 인화에 이르는 과정 역시 사진의 시간성을 담아내는 중요한 정서적 요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작업을 통해 나는 존재와 부재의 의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삶의 과정에서 정량적 시간인 크로노스와 자의적 의미를 지닌 정성적 시간인 카이로스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은 사진을 통해 시간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삶의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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