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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YLL Jan 18. 2024

교육은 자유를 논하는 일

거트 비에스타의 『가르침의 재발견』 1장을 읽고 난 이후의 짧은 비평문

지난 2023년 1학기, 운이 좋게도 거트 비에스타의 『가르침의 재발견』 번역본 초고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1장에 불과하긴 하나 비에스타의 교육 논의가 왜 많은 학자, 대중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몇 개의 문단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나 자신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하던 차에 지난 학기 작성했던 한 페이지 정도의 짧은 글을 여기에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감히 '교육은 자유를 논하는 일'이라는 제목을 붙여보았다.

작은 칭찬을 들은 것 치고 스스로에 대한 치사가 아닌가 싶다.




인생의 대부분을 가르침 받는 데에 투하하고 이제는 가르치고자 하는 인생의 시점을 살아내는 개인으로서 읽기 자료를 필자 본인의 삶에 비추어가며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쪼개어 보자면 교육에 대해 가지고 있던 환상, 실망, 고민, 상심, 경험, 결국에 찾아오는 기대에 비추어 보았다.


비단 교육뿐만 아니라 이념 혹은 현상에 관한 인간의 통찰을 담은 글을 읽을 때면, 그 글에 깊이 공감하든 구역감이 들든 관계없이 압도되는 느낌을 받곤 하는데, 이번 글의 경우 의심의 여지없이 전자에 해당한다 하겠다.

교육의 과업이란 다른 인간이 세계 속에서 성숙하게 존재함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라고 읽혔다. 그리고 존재하는 일이란 주체됨, 즉 주도권과 유일함을 통해 설명한 것처럼 우리 손 안에만 있지는 아니한 세계 속에 내던져진 것이며, 성숙함을 얻어가는 과정은 그 세계를 경험하며 느끼는 저항감으로 인한 반응과 관련된 일이라고 읽혔다. 굉장히 단순화한 문장이고 그래서 생략한 많은 세심한 사유의 과정이 있음을 잘 안다. 하지만 이렇게 해야만 몇 줄의 논평을 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하튼 이런 이해 뒤에 세 가지 주요한 교육적 작업 중에서도 중단에 대한 설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교육은 자유 그리고 자유케 하는 일과 깊이 관련된다고 믿어왔다.

이런 믿음 때문에 교육이란 접두어를 달고 펼쳐지는 여러 억압적이고 기만적인 인간 행위에 경악하곤 했다. 조심스럽지만 이런 경험은 대학 안팎이나 행위자의 교육에 대한 이해 깊이 정도를 따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교육과 자유는 사실 관련 없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많은 환상을 성찰하고 점검하였던 것처럼 이 또한 나의 오해에 불과한 것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다른 인간이 성숙한 존재가 되게끔 돕고자 하는 야망은 타인의 자유에 대해 관심을 표하는 것이며, 이것이 교육이 해야 하는 일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문장이 그 무엇보다 반가웠다.


중단이라는 교육적 작업의 의미도 중간지대 개념을 통해 자유와 연관 지어 이해했다. 중간지대야말로 세계적 존재의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는 장소인데, 이는 항상 머물러야만 하는 장소가 아니기도 하지만 그러할 수도 없는 장소이다. 촉진, 성장, 발달, 떠밀기, 부추기기, 응원하기 만으로는 도저히 도달하거나 도달하게 할 수 없는 장소이다. 이렇게 머물기 까다로운 장소이긴 하나 성숙한 존재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곳이며, 교육이 관심 가지는 자유도 여기에서만이 탐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중단은 유일한 교육의 선택지일 수도 있겠다. 감히 덧붙이자면, 세계파괴와 자기파괴는 진실로 끌릴 수밖에 없는 피난처이다. 필자는 이에 각각 ‘죽임’과 ‘죽음’이라는 표현을 쓰는 편인데, 세상에는 이미 이런 상태에 있는 아이와 어른이 너무나도 많다. 사실 교육에 대한 뜻을 품게 된 때에는 죽어있는 사람이, 그 뜻을 성찰하는 때에는 죽일 생각만 하는 사람이 함께했었다. 최근 문제시된 은둔하는 청년들의 소식 또한 이와 가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교육을 달고 이루어지는 인간 행위에는 양극단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실천 혹은 참여가 동반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


글 전체와는 다소 독립적으로 성숙함에 관한 절 마지막 문단에 크게 동감한다. 바로 근대적 삶이 자본주의 논리로 구조화된다면 우리는 욕구의 중단과 방해에는 관심이 없게 되며, 오히려 욕구의 증대에 초점을 부여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문단이다. 역시 어른과 유아의 대립이 곧 어른이 성숙하다는 것을 내포하지는 않는다. 이 글의 논조를 벗어나서 고민해 본다고 해도 어른, 많은 나이나 커다란 몸은 그다지 믿을 만한 지표가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르는 세계에서 우리는 성숙함이 결여된 유아적 상태를 좋아하고, 또 이용한다. 굳이 타인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개개인 스스로도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개인의 삶을 지탱해야만 하고 더 나아가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어야만 한다는 비합리적 신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환경과 지대를 고민할 새 없이 달릴 준비를 하고 있던 필자에게 큰 성찰을 제공하는 문단이었다. 문장의 이해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감히 어린 시절 안겨 있던 외할머니의 음성과도 같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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