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Nov 08. 2024

다 똑같은 것 입고 다니면 무슨 재미

찬바람에 눈을 뜬 현아는 잔뜩 화가 난 엄마의 얼굴을 마주했다. 학교 갈 시간이 다되었음에도 일어나지 않는 딸을 깨우기 위해 한겨울의 바람을 이용하셨다. 부랴부랴 책가방을 챙기고 도톰한 코트를 입는 현아의 입술은 점점 툭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학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으나 그 발걸음은 경쾌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터벅터벅. 저 멀리 경수네 무리가 보인다. 똑같은 브랜드의 패딩을 입고 걸어가는 것을 보자 그 걸음은 더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저게 얼마인지 아냐며, 저번달에 코트 사주지 않았느냐며 딱 잘라 안된다고 말씀하신 엄마의 단호한 음성이 귓가를 맴돈다. 그러나 마음속에선 가지고 싶다는 말이 고삐가 풀린 채 날뛰었다. 패딩을 입은 아이들 속 혼자 단추 달린 롱코트. 애써 태연한 척 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패딩 안 입은 친구들도 몇 명 있고, 그러니 괜찮을 거란 생각을 하며 어깨를 폈다.

사실 이게 처음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엔 스키니진이 유행해서 다리가 터질 것 같은 청바지도 산적이 있었다. 그 이후엔 바람막이도 유행을 했었다. 그땐 기말 성적을 평균 5점 올리면 사주신다 해서 정말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결국 나는 평균 6점을 올렸고 당당히 얻어냈다. 그 해에는 한겨울에도 그것만 입고 다녔다.

어른들은 '유행, 그거 다 지나가는 거라며 다 똑같은 것 입고 다니면 무슨 재미냐'라고 하셨다. 개성이 중요한 건 알겠지만 친구들과 같은 옷을 입고 그 옷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아니, 그냥 그 옷을 같이 입고 같이 서있는 것만으로도 소외되지  않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옷이 없다고 해서 나와 안 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내 느낌이 그렇다.


옷장을 정리하던 현아는 한편에 고이 접힌 털이 다 빠진 패딩을 발견했다. "엄마! 이거 왜 아직도 여기 있어?" 설거지를 하다 말고 방으로 들어오신 어머니는 고무장갑을 낀 채 흘겨보시며 말씀하셨다. "기억나? 너 이거 사고 싶다고 생난리 쳐서 사다 줬잖니. 그거 생각나서 내가 버리려다가 네가 또 난리 칠까 봐 내버려 두었다. 내 딸이지만 참 대단해. 네가 그렇게 끈질긴지 그때 다시 봤잖아. 얘." 그리고는 쿨하게 돌아섰다.

옷상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지금은 절대 사지 않을 옷을 그땐 얼마나 가지고 싶었던가. 돌아보면 내겐 저 옷만큼 든든한 방패는 없었다. 저 옷만 있으면 트렌드를 아는 멋쟁이였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학생이었다. 친구들과 같은 색으로 칠해지는 것을 어느 순간 그만두게 되었다. 솔직히 그게 언제부터인지, 왜 그만두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모임을 나가게 되었다. 현아를 제외한 모두가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걱정을 했다. 새끼백조들 사이의 새끼오리에게 질문은 쏟아졌다. 모은 돈에 대한 안부부터 웨딩 플래너가 되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니 노후까지 그려주는 친구들 덕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집에 오면서 직장을 다녀야 하는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고 싶어서 퇴직금 받고 나온 직장이 아른아른거렸다.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 엄마는 머리에 그루프를 만채 연속극을 보고 계셨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웃으시는 엄마 옆으로 갔다. "엄마, 나 다시 직장 구할까?"

"왜? 친구들이 뭐라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있다며 그건 어떡하려고."

"아니, 그건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들도 다 직장 다니기도 하고. 사실 너무 무작정 나온 것도 있는 것 같아."

"현아야, 엄마가 대학생 때 미니스커트가 유행한 적이 있었어. 엄마는 다리가 예쁘지가 않아서 항상 긴 바지를 입고 다녀야 했지. 그나마 롱 펜슬 스커트가 유행했을 때는 그게 다리를 좀 가려줘서 입고 다니긴 했거든? 근데 나는 내 다리 다 가려주는 통 넓은 바지를 더 많이 입었어. 또 엄마가 허리가 한 줌이잖냐. 배바지 딱 넣고 벨트 매고 다니면 사람들이 다 나 쳐다봤어."

"진짜야?"

"못 믿겠으면 너네 아빠한테 물어봐라. 그때 홀랑 빠져가지고 결혼했잖냐. 현아야, 남들이 다하고 좋아 보이는 거 네가 해봤는데 아니면 너한테 더 잘 맞고 장점을 더 쓸 수 있는 걸 하는 게 엄마는 맞다고 본다? 젊을 때 너 체력 될 때 다 해봐. 사업 그것도 강단 있고 체력 있어야 하지 아무나 못해."


방에 들어와 한참을 고민에 빠졌다. 이젠 유행을 따르지 않는 멋진 어른이 되었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들과 같은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길 바란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었다. 구석에 놓인 낡은 패딩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돌아가면 굳이 사지 않았을 패딩을 종량제 봉투에 조심히 담았다. 빵빵해진 봉투를 꽁꽁 묶어 내 다 버리고는 돌아섰다. 백조 사이의 오리는 날지 못하지만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아직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