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유행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마이크 샌덜교수님이 쓴 책으로 기억되는데 우리 사회에서 공정과 정의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하게 해 준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의는 공평함, 즉 평등을 의미합니다. 모두가 차별 없는 세상! 그 속에서 행복한 우리! 말만 들어도 설렙니다. 그럼 도대체 정의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화장실이 급한 경우가 있습니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화장실로 뛰어갑니다. 두 남녀는 화장실 앞에서 조금 있다 보자며 손인사를 하고 각자 화장실로 들어갑니다. 남자는 시원하게 용변을 보고 손을 씻고 나옵니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여자는 나오지 않습니다. 남자는 속으로 생각하죠. 작은 게 아니라 큰 것을 해결하고 있나? 그렇게 몇 분이 흘러 여자가 나옵니다. '화장실 줄이 너무 길어'라는 투덜거림을 함께 연발하면서 남자에게 미안함을 내비칩니다. 남자는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화장실에서 줄을 설 만큼 엄청난 인파가 있던 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휴게소 화장실을 떠올려봅시다. 남자 화장실에는 소변기와 대변기가 있고 그 수를 합치면 족히 100개는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 화장실에는 대변기만 설치되어 있죠. 똑같은 공간이라고 한다면 아마 30~40개 정도 설치가 가능할 것입니다. 비슷한 수의 사람이 몰린다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바로 위에서 제시했던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휴게소 화장실을 공정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자 화장실 공간을 더 확보하고 대변기를 100개 설치해야 하지 않을까요? 대부분 이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소변을 보는 방법과 시간을 고려한다면 남자가 훨씬 효율적입니다. 즉 더 짧은 시간 안에 용무를 마무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똑같이 100개씩 설치가 된다면 당연히 여자 화장실이 더 번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공정해지려면 여자 화자실 대변기 수를 150개 정도 설치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시간 안에 용무를 볼 수 있겠죠? 이렇게 정의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주고, 소외받지 않는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장치인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와 공정에 집착하게 되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불만스럽게 보이게 됩니다. 지금 당장 스마트폰을 열어 '차은우' 또는 '김태희'를 검색해 보세요. 그리고 다시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보세요. 정의로운가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런 차별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는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누구는 하루 세끼 식사조차 힘든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또 누군가는 키가 큰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고, 누군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170cm가 안 되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누군가는 높은 IQ를 물려받았는데 또 누군가는 평균 이하의 지능을 물려받습니다. 사실 세상은 전혀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공정함을 요구합니다. 그 공정함이 채워지지 않을 때 불만을 가지게 되고, 밖으로 표출하게 되면 과격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자본주의에 입각해 돌아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차별을 전제로 합니다. 누군가는 부자로 살아가고, 누군가는 가난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공정과 평등을 강조하게 되면 이런 모든 현실을 부정하게 되죠. 현재의 삶이 불행한 이유는 모두 사회의 탓이며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우리의 행복도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렇게 발생한 혁명이 역사 속에는 많습니다. 그런데 그 혁명 후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되었나요? 공정과 평등을 외친 사람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었나요? 오히려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을 만들어내고 더 혼란스럽게 변하지 않았나요?
완전한 공정과 평등이 가능할지 사실 의문입니다. 유명한 연예인(이 연예인에 대한 사적 감정은 전혀 없음) 이 젊은 세대를 위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판사의 망치와 목수의 망치가 같은 가치를 지닌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에 많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특히나 구직을 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로서는 한 줄기 희망과도 같았을 테니까요. 길거리에서 폐지를 줍던, 수술대에서 수술을 하던 비슷한 임금과 복지 그리고 사회적 존경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이니까요. 그 강의의 결론은 지금 우리의 불행은 사회 시스템과 나라 탓이다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모두 남 탓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의 시스템(또는 정부)을 뒤엎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강연을 마친 후에는 시간당 수천만 원의 강의료를 받아 갔습니다. 저는 교사이고 강의를 하면 첫 시간은 10만 원 추가되는 시간은 6만 원을 받습니다. 이것도 잘 받으면 그렇고 학생 강의 때는 시간당 5만 원 밖에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저도 그 연예인처럼 준비해서 대중들의 마음을 울리는 강의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강의료는 그분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습니다. 그토록 정의를 외치면서 자신의 일에서는 철저히 자본주의 시시템을 따르는 그분을 보고 저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폄훼하고 질책하던 자본주의, 차별적 세계관 속에서 그는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현실은 바로 이렇습니다. 미제의 천민자본주의로 인해 우리의 삶이 팍팍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도 좋은 차와 멋진 집을 꿈꿉니다. 그들의 자녀는 미국의 명문대에 진학해서 더 좋은 경험을 하길 원합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어떤 미국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영화 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다 보니 시청한 영화도 적고 제목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영화 속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하나 있어 소개하려 합니다. 주인공은 수완이 정말 좋은 사업가였는데 그의 회사는 담배회사였습니다. 많은 시민단체들이 건강을 이유로 금연을 외치는데 기발한 아이디어로 그런 주장들을 이겨버리죠.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창의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무력화시켰습니다. 하루는 유명 연예인이 폐암에 걸려 담배의 위해성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예정하자 그를 찾아갑니다. 그때 자신의 아들과 동행을 했는데 그 연예인을 회유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이 든 가방을 준비했죠. 그리고는 그 연예인에게 돈가방을 내밀었습니다. 그 연예인은 돈으로 자신의 신념을 사려했다며 주인공을 비난했지만 돌아오는 길에서 그 방법이 제대로 먹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기에 물었습니다. '아빠! 그 연예인이 돈가방을 받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자 주인공은 답합니다. '그건 말이지. 그 사람이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야!' 즉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 중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입니다. 가슴속으로는 공정과 정의, 평등을 외치면서 실제 행동은 그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습니다. 저도 한 때는 경제적 평등과 사회적 모순, 부조리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했고, 행동으로 옮기고자 작은 노력도 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속성에 대해서 알아가자 사고의 변화가 필요하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물론 그 이면에는 사회주의라고 하는 나라들의 이중적인 태도와 더욱 심각한 빈부격차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군으로 추앙하는 세종대왕시절은 곡물의 생산량도 높았으며 국력도 강해 그야말로 태평성대였습니다. 우리 후손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한글 창제와 다양한 과학기술의 발전도 함께 있었으니 가히 최고의 지도자로 손색없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전 국민의 47%가 노비였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것도 미국같이 서로 다른 인종을 노비로 삼은 것도 아니고 같은 민족을 노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유로 지금에 와서 세종대왕을 욕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불편해하는 사실들이 그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근본을 무시하고 불만만 가진다면 개인적인 발전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물론 수정자본주의로 가야 하는 것은 시대적 흐름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라는 게임 속에서 그 룰을 최대한 활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입니다. 조금은 불편하실 수도 있는 글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눈으로 바라본 현 사회의 이면을 담았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