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그려본 미래 사회(1984 VS 멋진 신세계)
예전에 교과서에서 '동물농장'의 일부분이 나온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을 몰아내고 동물들만의 왕국을 건설한 농장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완전한 자유를 누릴 줄 알았지만 결국 권력을 잡은 돼지 무리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져가는 동물농장을 잘 묘사했던 것 같습니다. 동물농장의 저자 조지오웰은 신랄한 사회 풍자를 통해 시대상을 잘 표현하는 작가인 것 같습니다. 그의 또 다른 역작 1984는 미래 사회를 예측한 또 다른 종류의 소설입니다. 과거 한 프로그램에서 진중권교수님이 패널로 나와 현시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소설 1984와 멋진 신세계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관점으로 두 소설을 비유했는지 궁금증도 들었고 권력, 자유의지, 인간의 본능에 따른 미래 사회를 예측해 보고자 두 소설을 기반으로 미래사회에 대한 통찰을 해보려 합니다.
소설 1984 속에 나오는 주인공은 윈스턴이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은 빅브라더라는 신적 존재가 있고, 텔레스크린이 모든 곳을 감시하는 폐쇄적인 사회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항상 감시당하고 있고 말실수를 하거나 불건전한 생각을 들키는 날이면 그날로 그 사람에 대한 존재 자체가 사라집니다. 윈스턴은 나름 깨어 있는 시민으로서 겉으로는 사회에 순응하는 척 하지만 속마음은 혁명을 꿈꾸고 있었죠. 집안에 있는 텔레스크린의 사각지대를 찾아 개인적 일기를 쓰며 사회에 대한 소심한 반항을 하기도 합니다. 그가 근무하는 곳에서 가끔 마주치던 줄리아라는 여성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함부로 말을 붙이거나 애정을 드러낸다면 그 또한 당에 의해 반역죄로 사라질 수 있음을 알기에 그는 혼자서 그녀의 마음까지 정의하며 살아갑니다. 그녀가 그에게 관심이 없고, 무뚝뚝한 여성이라는 자기만의 암시를 걸어 마음속으로 밀쳐내곤 했습니다. 이 사회 속 누군가는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갔죠. 그러던 어느 날 윈스턴은 줄리아로부터 쪽지를 받습니다. 마치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법으로 받은 쪽지를 통해서 둘은 첫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군중들 속에서 조차 누군가 감시할 수 있다는 공포를 뚫고 안전한 방식을 찾아 밀회를 즐기게 되죠. 폐쇄적인 사회 속에서도 사랑은 꽃피는 모양입니다. 쌀쌀맞고 무뚝뚝하던 여성이 윈스턴을 위해 분을 바르고 무뚝뚝하던 표정은 어색한 미소로 변하는 것이 남녀 간의 사랑인가 봅니다. 둘의 사랑만큼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라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맹세를 하기도 했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윈스턴과 줄리아는 믿고 있던 사람으로 인해 체포되고 맙니다. 그리고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게 되죠.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사람은 당의 높은 간부였고 윈스턴은 철저히 재교육화를 받게 됩니다. 말이 재교육이지 고통과 고문을 통한 인간개조에 가까웠죠. 소설 종반부로 갈수록 윈스턴의 신념과 사상은 희미해져 갑니다. 하지만 그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한 가지, 바로 줄리아에 대한 사랑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결국 무너졌습니다. 이제 윈스턴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사회 속의 일원이 되어 미디어에 선동당하고, 하지도 않는 전쟁에 열광하며, 당첨자의 신원도 모르는 복권 당첨을 기대하면서요.
완전한 사상 교육이 되고 난 후 윈스턴과 줄리아는 다시 재회하지만 서로 회피하고 말죠. 끝까지 지키려 했던 둘의 사랑이 결국 고통과 고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서로에 대한 미안함으로 더 이상 찾지 않게 된 것입니다.
소설 1984 속 사회는 감시와 통제를 통해 인간을 조종합니다.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철저히 감시당하며 자유는 어디에도 없죠. 모든 곳에 설치되어 있는 텔레스크린은 권력자들의 욕망을 나타냅니다. 이 사회 속에서 인간 개인의 존재나 인간성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으며, 과학과 기술적 진보, 정치적 선동과 세뇌로 인간은 조절되고 사멸되어 갑니다. 개인이 가지는 의심과 의혹은 무력 앞에 무너지고 역사는 상황에 따라 새롭게 재창조되어 갑니다.
반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완전히 다른 세상 같습니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행복하다는 생각을 강제로 주입당하며 성장합니다. 사회는 완전한 계급 사회로서 각 계층마다 누릴 수 있는 것이 다릅니다. 더 이상 인간의 사랑에 의해 생명이 탄생하지 않으며 결혼과 육아에서 완전히 해방된 남녀들은 자유로운 연애와 일상을 즐깁니다. 새로운 생명은 거대한 공장에서 계급별로 DNA조작에 의해 태어나 길러지고 사상교육을 받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의 태생이나 역할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으며 주어진 일을 하죠. 질투, 미움, 시기 등 불완전한 욕망이 끓어오를 때는 소마라는 향 정신성 약물을 통해 말끔해 씻어내고 신체적, 정신적 욕망은 촉감 영화를 통해 발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죽음은 즐거운 일이며 모두가 웃는 곳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다면 누구와도 성관계가 가능하고 이것은 죄악시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예전 인간 사회에 살던 야만인(지금 우리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 사회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가 첫눈에 반한 레니나라는 여성은 삶과 죽음, 연애 등 모든 인생사에 대해서 철저히 조건반사교육을 받은 인간이었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정절, 부끄러움, 사랑에 대한 관념자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야만인은 곧 깨닫게 됩니다. 원하는 것을 언제든 얻을 수 있고,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으며, 생활의 안정과 더불어 질병이 사라지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늙는 것을 걱정하지도 않는 세상. 아내, 자식, 부모와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상도 없이 그저 본능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에서 야만인의 사고는 비이성적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야만인은 궁금했습니다. 모두가 알파계급(최고위층)으로 태어나게 하면 되지 왜 계층의 차이를 두고 출생시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알파계급만 존재한 세상은 너무나 어지러웠습니다. 더 높은 위치에 있으려는 욕심으로 싸우고, 짓밟고, 죽이기까지 하는 상황을 목도하고 적절한 계급의 분리는 완전한 사회를 위한 필수요소였죠. 태어나서 성장할 때까지 서로 다른 계층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지 않는 것도 결국 조건반사적인 교육 때문이었습니다. 잠시 떠오르는 불필요한 감정과 생각(자유, 평등, 비판, 사랑, 증오 등)은 소마를 통해 완전히 각성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완벽한 사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결국 야만인은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말 그대로 야만인처럼 숲 속에서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면서 생활하게 되지요.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 것 같나요? 빅브라더에 의한 텔레스크린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일까요? 아니면 과도한 자유가 주어지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살게 될 사회일까요?
텔레스크린이라는 직접적인 감시도구는 아니더라도 스마트폰, CCTV 등 넘쳐나는 감시도구들이 우리들의 사고와 생활 패턴을 인식하고 교묘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자유의지대로 물건을 구입하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는 인공지능에 의해 여론이 조작되고 물건을 충동구매하게 됩니다. 굳이 미래사회까지 가지 않더라도 현재의 삶을 살펴보면 미래의 세계가 그려집니다. 북한과 같은 통제 국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회는 멋진 신세계와 같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의식을 가진 상위 몇 퍼센트의 권력자에 의해 나머지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누린다는 착각 속에서 평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인공지능에 의해 통제되는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은 세뇌되고 사고의 흐름조차 빼앗기게 되죠. 그리고는 마치 그것이 자신의 생각인양 믿어버리게 됩니다.
인간답게 사는 것이란 어떤 삶일까요? 미래사회가 반드시 축복만은 아닐 것이란 걱정은 기우일까요? 교묘히 통제당하는 대상으로 살 것인지, 리더로 살 것인지는 지금부터의 결정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원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