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나너의 기억》전시 리뷰
기억은 단순히 무언가를 잊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좋았던 기억, 끔찍했던 기억, 잊고 싶거나 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그저 뇌에 저장된 파편이 아니라는 뜻이다. 기억은 내가 나 일 수 있게 한다.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을 이어주고, 새로운 자극이나 경험에 흔들리지 않는 기반이 되어준다. 또한 이전과 다른 변화가 생기더라도 동일한 존재라는 타당성을 부여해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직까지도 기억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현대 사회는 굉장히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물론, 팬데믹으로 인한 혼란이 이를 가중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일주일 단위로 달라지는 영업 제한은 사소한 시간문제에서 그치지 않고 거대한 혼란을 야기했다. “어제는 9시 마감이었는데, 오늘부터는 10시...”, “다음 주부터 제한이 풀린다더니 한 주 미뤄졌대요.” 청기백기처럼 눈앞의 변화에만 휘둘려 순응하는 삶을 길게 지나왔다. 우리는 잠시 멈추고 재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무작정 변화에 무뎌지지 않아야 한다. 나의 의견과 그들의 의견을 짚어보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해야 한다. 무분별적으로 기억되고 수용되는 이 시점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를 짚어낸 것이 국립 현대미술관의《나너의 기억》이다. 《나너의 기억》은 <나너의 기억>, <지금, 여기>, <그때, 그 곳>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총 13팀이 참여한 본 전시에서는 비디오, 회화, 설치 등 다 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건넨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면 앤디 워홀의 <수면>(1963)이 한 면을 가득히 메우고 있다. 잠을 자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흑백으로 이어진다. 별다른 이슈 없이 진행되는 영상이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는 수면 중 뇌에서 정보를 처리하여 기억으로 남기는 과정을 은유한 것 이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코바늘> 연작은 과거와 현재의 연속적인 흐름을 보여준다. 동양에서는 붉은 실이 ‘인연’을 의미한다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또한 첫사랑에 대해 인터뷰를 한 뒤, 이를 회화로 재구성하는 박혜수의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도 타인의 기억에 있어서 제3자인 작가가 어떠한 역할을 수행해낼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다.
아마 양정욱의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2013) 앞에서 발길을 멈추는 사람이 많으리라 예상한다. 전시장이 대체로 어두운데, 조명을 품은 그의 작품은 유독 빛나기 때문이다. 등불처럼 은은하고, 마치 자장가, 혹은 ASMR(뇌를 자 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영상)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작품의 일부가 부딪히고, 떨어지고, 당겨지 며 발생하는 반복되는 소리와, 조명으로 인해 벽면에 드러나는 거대한 그림자는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끊임없는 움직임은 피로를 유발하지만, 이는 종종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꿈을 동반한다.
작품들이 간접적, 혹은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같다. 현실을 잘 짚어봐야 한다는 것. 기억은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통해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이는 미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기에, 현 시대와 그 구성원인 스스로의 기억을 짚어본다면,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전시는 8월 7일까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