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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 Jul 11. 2022

고독하지만 ‘괜찮습니다’

<춘엽니·비구니(1967)> 분석 및 리뷰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중 <춘엽니·비구니(1967)>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가 진행 중이다. 이 전까지는 그에 대해 들어본 적도, 작품을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동시대 미술가가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보았다. 막상 전시의 정보를 찾아보니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회고적 전시였고, 생각보다 훨씬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었다. 회화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의 미술 세계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현대 조형물을 제외하고는 내가 상당히 무지했음을 깨달았다. 조각은 특히나 그러했다. 더 넓은 세계에 대한 공부와 확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권진규는 누구인가? 그는 조각가임과 동시에 수행자였다. 테라코타와 건칠을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특히 여성상으로 유명했으나, 말, 고양이, 입 상, 좌상 불상 등 다양한 주제로 작업하였다. 그의 작업에서는 일정한 흐름이 느껴진다. 작품 자체가 작가의 서명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나는 조각 작품에 대해 별 감흥을 갖지 못했던 사람이다. 조각 자체의 조형적, 미적 속성과는 별개로 서사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인지, 혹은 조각이 장식적인 역할로써 오랜 기간 존재했기 때문인지. 조각은 누군가의 의도와 염원을 담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사실 그대로를 묘사한 사진 같았다. 그러나 의외로 권진규의 작품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특히나 흉상 작품에서 그러했다. 


이전의 양식에서는 벗어난 <불상>이나, 독특한 표현 방식의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주는 <지원의 얼굴>도 물론 좋았다. 둥글게 진열된 귀여운 고양이 작품들도 마음에 들었다. 그 중에서도 내 눈을 오래 머물게 했던 <춘엽니·비구니(1967)>에 대 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는 1967년에 만들어진 테라코타 작품이다. 테라코타는 이탈리아어로 ‘구운 흙’이라는 뜻이며, 좋은 품질의 점토를 구워 만드는 방식이다. 만든 형태 자체로 구워 만드는 경우도 있고 주형을 뜨는 경우도 있는데, 권진규의 경우는 후자이다. 그는 테라코타에 대해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다는 점’과 ‘결정적인 순간에 딴사람(끝손질하는 기술자)에게로 가는 게 없다는 점’이 작가로서 재미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썩지않는 테라코타의 특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먼저, 작품 속 비구니의 눈을 살펴보자. 살짝 내리 깔려있는 눈꺼풀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감고 있는 듯하고, 가까이 보면 겸손한 태도로 무언가에 순응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춘엽니’라는 이름의 비구니가 등장하는 소설이 발견되었다는데, 소설 속 그녀의 삶이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당장 눈앞의 고통에 순응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인생에 대한 겸허한 순응일까. 불교에 대한 침잠과 평생의 고독, 작가의 수행적인 인생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자신의 삶에 대해 ‘괜찮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사실 이 조각은 인체 구조적인 면에서 보면 다소 어색하다. 어깨가 극단적으로 좁고 가파르기 때문이다. 물 흐르듯 떨어지는 부드러운 곡선도 비현실적이다. 또한 장식적인 묘사가 배제되어 있고, 그래서 인지 눈에 띄게 특징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신비로운 표정’이 아닐까 싶다. 작가가 불교에 매진했던 만큼, 작품에서도 그러한 특성들이 잘 녹아들어 있다.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들을 자비로써 품어줄 것만 같은 비구니의 온화한 표정. 동시에 굳건하고 단단한, 내면의 평안함이 잘 드러난다. 마치 성숙한 인간상을 대면하는 것 같기도 하다. 형태적으로는 어색했던 어깨도 얼굴과 잘 이어져, 이러한 인상을 극대화시킨다. 옷과 같은 부수적인 요소들을 섬세하게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에 시선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 같다. 표정 외에 많은 요소들을 덜어냈지만, 부족하거나 비어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담백하고, 건강하게 느껴졌다. 내부를 열어보진 않았지만, 이 조각의 내부에는 한 치의 틈도 없이 완고할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추가적으로 전시장 내부의 조명이나 위치, 좌대 또한 적절히 제 몫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그는 약 4년 후, 건칠로 같은 형상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삼베를 한 장씩 쌓아올리는 행위, 건칠은 그야말로 수행에 가깝다. 이는 우리가 염원을 담아 돌탑을 쌓아올리는 행위와 맞닿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싶다. 권진규의 삶은 쓸쓸하게 마무리되었지만, 그의 염원은 작품에 온전히 남아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소박한 수행자의 삶을 살았던 권진규, 노실의 천사를 찾고자 했던 권진규. 그의 작품은 선명하게 그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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