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미술 주요 키워드 '초국가성'
역사를 되짚어보면 어느 분야에서나 서구 중심주의가 만연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서구 백인 남성’적 시선으로 대변되는 창작, 서술, 수용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유럽(이후에는 미국)을 기준점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소외된 여성, 아시아, 원주민, 어린이 등의 소수자들은 역사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꾸준히 목소리를 냈지만 받아들이기에는 학습된 서구적 시선이 너무 완고했다. 최근에 들어서야 기존 역사에 대한 반성, 특히 제국주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며 이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이 전세계적으로 시작되었다. 역사학에서는 포스트-역사학의 일환으로 일상사, 유럽 지방화하기, 언어적 전환 등의 연구가 제안되었는 데, 이는 전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성이기도 하다.
미술에서도 다양한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세계화에 따른 탈민족국가적-초국가적 인식이 그것이다. 또한 이주민들이 늘어나면서 ‘디아스포라’ 개념도 논의되고 있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국립 기관과 SBS에서 주최하는 《올해의 작가상 2021》에서 최찬숙 작가의 <큐빗 투 아담>이 수상했다는 점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외에도 페미니즘(1) 작품, 생태-환경을 고려한 전시 방식 등을 짚어볼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국립 이외의 미술관에서도 친환경, 지속가능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의《조선, 병풍의 나라1》은 가벽을 설치하지 않음으로써 폐기물을 줄이고 쇼케이스를 재활용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또한 《제 14회 광주 비엔날레》에서도 박스 용지를 사용하여 캡션을 제작하는 등의 방식을 제시했다.
근 10~20년의 현대미술 담론을 살펴보았을 때, 가장 중심이 되는 키워드는 ‘초국가’라고 생각한다. 앞서 살펴본 소수자들의 미술, 페미니즘, 생태 등의 논의는 ‘초국가’라는 담론으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존 서구 중심의 시각에 대항하는 움직임으로 민족과 문화가 힘을 얻고 있다. 이전까지 소외되었던 문화에 관심을 갖는 태도는 ‘문화의 발굴’의 측면 외에도 국가 단위의 문제를 전지구적인, 공동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이는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주제인 ‘나의 이야기’, 혹은 ‘너의 이야기’에서 ‘우리의 이야기’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듯 하다. 초국가적(supranational)이라는 말은 단순히 국제적(international)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국가 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국제적’이라는 단어와 달리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미술계에서는 국제적인 미술관들의 연대·주도 하에 개최되는 국제전, 비엔날레를 그 예시로 들 수 있겠다. 특히 광주 비엔날레는 약 40개국(2023년 기준)의 작가들의 작업을 전시하고 있으며, 2018년 ‘파빌리온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파빌리온에서는 세계적인 미술 담론을 다 루고, 학술 교류나 워크숍 같은 공공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인도네시아, 라오스, 말레 이시아, 미얀마, 필리핀, 싱가포르, 아르헨티나, 캐나다, 독일, 일본 등이 참여하고 있다.《제 14회 광주 비엔날레》의 전시 개요에서는 ‘지구를 저항, 공존, 연대와 돌봄의 장소로 상상해보고자 한다.’, ‘지구적 이슈 – 하나의 엉킴(entanglement)’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제 13회 광주 비엔날레》에서도 역시 ‘반주류적 사회 관계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공동체 의식’, ‘전 지구적 관점’과 같은 표현이 드러난다. 제 14회와 제 13회 전시 전경은 사실상 비슷한 느낌을 준다. 다소 민족적, 토속적인 경향의 작품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이는 파라 알 카시미의 <특별 한 날들을 위한 편지>(2023)(2)이나 헤라 뷔육타쉬즈얀의 <속세에 속삭이는 자들>(2023)(3) 등의 작품에서처럼 주제나 재료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러한 국가 단위의 공동 작업이 필연적으로 ‘초국가적’ 담론으로 이어지느냐에 대한 질문은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민족성’, ‘민족 문화’, ‘소수 문화’를 다루는 작업들이 오히려 민족 단위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닐까하는 우려도 된다. 이는《제 14회 광주 비엔날레》개요의 ‘각각의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에 뿌리를 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착적인 지식을 중시하는 대안적 지식 구조의 가능성을 가늠해 본다. 동시에 차이를 존중하며 함께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유사성 뿐만 아니라 개별성 안에 내재하는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부분에서 일부 이해해볼 수 있기도 하다. 또한 ‘초국가’라는 것이 새로운 담론의 필요성과 세계화에 따라 불러 일으켜진 개념이 아닐까하는 의심도 지울 수 없다. 모든 담론 및 개념이 작업에 완전히 적용되기 어려운 것을 안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현대미술과 관람객들의 이해 간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것처럼, 국제적인 이슈인 초국가성과 현재의 미술들이 아직 유리되어 있는 듯 보인다. 초국가성에 대해 충분히 논의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앵무새처럼, 혹은 시류에 따라 단어를 나열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1) 이는 여성주의에만 국한되지 않은 의미의 페미니즘을 일컫는다.
2) 아랍 문화, 양식, 취향 등. 서구로의 이주 기록을 담은 아카이브.
3) 신화에 기반한 작업. 콘월의 석상과 한국의 고인돌의 유사성에 주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