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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 Apr 29. 2024

‘입김’과 <아방궁 프로젝트>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프로젝트 그룹 '입김'에 대하여

  한국에서 여성미술의 형성과 전개 과정은 사회,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연구에서는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시작 기점은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의 발족이라고 논의되고 있다.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외국 미술작품이 대거 유입되면서 한국 미술계도 이러한 변화에 반응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한국 사회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수용하면서 함께 대중문화가 확산되었고, 여성의 역할에 대한 비중이 커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은 페미니즘 미술에 관한 논의가 배제되었던 한국 미술계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 미술은 기존 남성중심주의적 시각을 포함하는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이라는 공통적인 맥락에서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여성미술운동은 민중미술계열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중 1985년 김인순, 김진숙, 윤석남이 결성한 ‘시월모임’이 그 시초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1986년 제 2회 시월모임 전시 <반에서 하나로>는 최초의 여성주의 미술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들은 1985년 민중미술협의회에 가입했으며, 한국 여성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정정엽이 속한 ‘터’의 동인들과 함께 1986년 12월 협의회 내부에 ‘여성미술연구회(이하 여미연)’ 분과를 조직한다. 당시 그들에게 여성미술은 ‘여성해방미술’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민중미술과 결을 같이하여 여성노동자들의 현실에 초점을 맞추어 작업했다. 여미연은 노동현장과 연계활동을 위해 1987년 걸개그림패 ‘둥지’를 결성했으며, 1988년에는 ‘둥지’와 ‘엉겅퀴’를 결합하여 ‘노동미술연구회’라는 소집단을 결성한다. 여미연은 성차별적 사회에서 받는 여성의 문제를 노동계급의 여성문제로 확장했으나,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겪는 문제와 여성성 부분을 간과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반면 윤석남 같은 작가들은 ‘또 하나의 문화(이하 또문)’라는 단체와 관계를 맺으며 여미연이 간과한 다양한 한국 여성 문제, 특히 중산층 여성들에 대해 다루기도 한다. 1994년에는 용인 한국미술관의 주최로 <여성, 그 다름의 힘>전이 열렸는데, 이는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최초의 종합기획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여미연은 1994년 급작스럽게 해체되었는데, 그 이유는 민주화의 물결과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퍼지며 근간이 되었던 민중미술의 필요성이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미연의 해체는 여성으로서 미술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없어진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1997년 여성 미술을 이어가고자 했던 여미연의 몇몇 작가들이 모여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프로젝트 그룹 ‘입김’을 결성한다.


  곽은숙, 류준화, 우신희, 정정엽이 초기 멤버였고, 이후 김명진, 윤희수, 제미란, 하인선이 참가하여 총 8명의 작가들이 미술활동을 전개해나간다. 1990년대는 여성 미술과 관련한 공개적인 문화행사가 많이 개최되었다. 1999년 9월 예술의 전당에서는 제 1회 여성미술제인 <팥쥐들의 행진>이 개최되었는데, 이는 대규모 미술행사로 120여명의 작가들이 140여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는 다양한 여성 미술을 제시하고, 이후 여성 미술 활동에 기반을 마련하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여성 미술부터 근대, 1980~1990년대 현대 여성 미술까지 아우르는 전시를 기획하고자 했다. 그러나 1990년대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 전개되었던 시기인데, <팥쥐들의 행진>에서는 기존 1980년대 여성 미술을 이끌던 작가들이 많이 참가하여 그 흐름을 읽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2002년 대방동 여성 플라자에서는 제 2회 여성 미술제인 <동아시아 여성과 역사>가 개최되었고, 2005년에는 제 3회 여성미술제 <판타스틱 아시아: 숨겨진 경계, 새로운 관계>가 개최되었다. 2008년 10월에는 경기도 미술관에서 <언니가 돌아왔다>가 개최되었다. 


  이필의 연구에 따르면 여성 미술의 범주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제작자의 성별 구분 없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미술이며, 두 번째는 제작자가 여성인 동시에 여성 주체로서의 감수성을 표현한 미술, 세 번째는 제작자의 성별 구분 없이 여성주의 문제의식을 미술에 수용한 미술이다. 한국 여성 미술의 역사에서는 세 가지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표현 방식과 태도에 있어 차이점도 존재했기 때문에, 명칭 역시 분리되었다. 김현주 연구자에 따르면 이러한 명칭 분류는 중요한데, 명칭 속에는 그것이 전개된 사회의 가치관이나 편견, 권력구조 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여류미술이다. 이는 가장 먼저 나타난 용어이며, 남성미술인 주류미술과 분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생물학적 성과는 무관하게 ‘예술성을 추구하는 여성작가들의 미술’이라는 의미가 있다. 두 번째는 여성미술이다. 1980년대에 민중미술계열 여성 작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여성 미술’은 계급적 해방이 여성 해방을 가져올 것이라는 신념하에 ‘여성 노동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여성의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계급 문제로 환원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 번째는 여성주의 미술이다. 이는 노동계급 여성에 편향되었던 여성미술과 다르게 서구 페미니즘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중산층 지식인 여성들의 현실 문제를 탐구하였다. 네 번째는 페미니즘 미술인데, 198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수용과 맥을 같이 한다. 기존 여성미술과 여성주의 미술에 대한 인식을 확장 및 발전시켰으며, 신세대 여성미술가들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프로젝트 그룹 ‘입김’은 ‘소외되고 숨겨져 있는 여성들의 문화를 발굴하고, 여성주의 입장에서 다양한 미술 실천 활동을 위해’ 결성되었다. 입김이 결성된 1990년대 후반은 한국 사회 및 대학 캠퍼스에서 여성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인데, 이러한 사회문화적 분위기가 일부 작용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입김’은 여성의 따듯한 기운으로 언 땅, 언 손, 차가운 마음을 녹이고 폐쇄적 미술 문화에 소통의 언어와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후 다루겠지만) 잔잔하게 세상을 녹이는 입김이 되고 싶다는 작가들의 의도와는 달리 <아방궁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자기주장이 강한 ‘입김 센’ 여자들이라는 의미로 변화했다. 입김의 멤버들은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며, 일부 멤버는 <팥쥐들의 행진>에 참가하기도 했고, 선배 여성주의 작가들과의 교류와 지지를 얻으며 여성주의 그룹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해갔다. 


  2000년 5월에 첫 번째 기획전시 <집사람의 집>을 개최한다. 안사람으로 규정된 여성들에게 집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가고자 기획된 전시이다. 2000년 11월에는 대안공간 ‘풀’의 <안티조선>전시에 참가한다. 이는 언론의 가부장적 속성과 그 속에서 희생된 여성의 삶을 상징하는 작품을 전시한다. 2001년 3월에는 시립미술관의 <물>이라는 기획 전시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독립예술지원 대안미술’ 공모전에 선정되어 여성 미술 프로그램 <우리 안의 여신>을 기획했다. 2002년 8월에는 한일 여성예술가 네트워크 프로젝트인 <아트 마라톤 프로젝트: 여성, 여성을 만나다>를 기획하였고, 2003년 9월에는 <2003년 아시아의 지금>이라는 전시에 ‘코리아 환타지-성매매’라는 주제로 참여한다. 2004년에는 경북 봉화군 비나리 마을에 위치한 비나리 산골 미술관에서 <유쾌한 파종> 전을 진행한다. 이는 소외된 여성뿐 아니라 소외된 공동체로 미술 활동을 확장했다는 평을 받는다. 2006년 5월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여성, 일, 미술>전에서 여성 노동의 의미와 가치가 변질되었음을 비판하는 작품을 전시한다. 2006년 7월 소마미술관에서는 <내일>전에서 ‘입김’의 10년 동안의 작업들을 소개한다. 그들의 공식적인 활동은 2006년에서 멈추지만, 2018년 12월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아방궁 프로젝트>의 프로젝트 일지를 전시한다. 


  ‘입김’의 작업 특징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공동 창작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여성주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여성주의 미술을 실천했다. 세 번째는 이후 소외된 타자들에게로 관점을 확장했다는 것인데, 이는 <유쾌한 파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네 번째는 결과물보다는 과정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는 실천적인 행동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사회적 문제에 직접 개입했으며, 과정 지향적이며, 다양한 매체를 수용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는 ‘입김’의 프로젝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2000년 김대중 정권은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새로운 예술의 해 추진위원회’를 설립한다. 문화관광부의 추진위원회가 주도하여 진행한 ‘2000, 새로운 예술의 해’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미술 축제 전시 분야의 세 가지 공모 주제 중 ‘공공의 광장에서: 삶과 예술, 미술과 여타 예술, 순수와 응용, 고급과 저급, 장르와 장르 등 모든 형태의 경계 해체’ 부문에 <아방궁 프로젝트>가 선정되었다. 그들은 가부장적 왕실 문화의 터전인 종묘 앞에 위치한 종묘 시민 공원에서 여성의 놀이 문화를 제시함으로써 남성중심 사상을 전복하고자 했다. 다양한 설치물과 이벤트, 퍼포먼스, 게임 등 다양한 감각을 동원하는 미술활동을 기획하고, 3일 동안 이를 진행하고자 했다. 류준화의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 일지를 살펴보면 ‘자궁 터널, 탄생 체험’, ‘여성의 몸 읽기’, ‘~마라 길’, ‘아방궁 댄스 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음을 알 수 있다. ‘아방궁’은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본래 진나라의 시황제가 기원전 212년 건립한 대규모의 황궁이다. 수많은 여자들을 가둬두고 성노예로 살아가도록 했던 공간이기도 한데, 이렇게 아방궁이 표상하는 남성의 욕망을 전복시키고자 한 것이다. 자궁은 서구의 1세대 페미니즘 미술의 대표적인 도상이기도 한데, 이를 드러냄으로써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의 욕망의 대상’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인식을 해소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된다. 그러나 보수 단체 – 전주 이씨 종친회의 방해로 일부는 중단된다.


  프로젝트 하루 전 시민일보에서는 ‘가부장 상징 종묘, 여성들이 점거하다’라는 기사를 보도하는데, 시민단체의 한 남성 활동가가 전주 이씨 종친회에 이를 알리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종묘제례협회와 종친회는 행사를 중단하라는 입장을 통보하였으며, 욕설과 협박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그들은 세계문화유산인 종묘를 훼손한다는 것, 작품들이 노골적이고 혐오스러운 이미지로 남성들을 자극한다 등의 이유로 상스러운 행사를 진행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종묘가 아닌 인근 시민공원에서 진행되었다는 것, 공모전에서 채택된 프로젝트였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못하다. 당일 아침 종친회와 성균관 유림 소속의 백여 명의 남성 회원들이 작품을 파괴하고, 성적인 폭언을 일삼는 등 전시를 방해했고 결국 ‘입김’은 철수를 결정한다.


  2000년 9월 30일 ‘입김’은 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리고 10월 2일 ‘종묘시민공원 미술전 폭력 저지 사태 관련 표현의 자유를 위한 비상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10월 4일 이씨 종친회에 공개 사과와 대화, 공개토론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러나 아무런 입장 표명이 없자 10월 18일 소송을 제기한다. 2000년 10월 29일에는 종로에서 <아방궁 프로젝트> 방해 사태에 대한 항의 시위의 일환으로 <여성문화축제>가 개최된다. 2001년 6월 26일에는 1차 재판이 진행되었으며, 개인당 백만 원의 합의금으로 재판을 취소할 것을 권했으며, 공식적인 사과 대신 개인적인 사과로 사건을 종결시키고자 했다. 2002년 9월 17일 ‘입김’은 조직적으로 방해했다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1심에서 패소한다. 그러나 이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각인시켰다는 의의가 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2002년 10월 10일 항소한다. 비디오에 “오늘도, 내일도 나와서 이 행사를 저지합시다...”라는 종친회의 발언이 증거물로 채택되어 사소한 마찰이 아닌 조직적인 방해 행위였음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2003년 3월 12일, 3년에 걸친 재판이 ‘입김’의 승소로 완결된다. 이들의 승소는 한국에서 여성미술가들이 더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을 가져왔으며, 대중들이 여성 차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입김’은 1심 재판 중 2002년 관훈 미술관에서 개최한 <공유>에서는 <아방궁 프로젝트>의 저지사태에 대한 증거들과 재판과정 중 나온 자료들을 전시한다. 또한 제 3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2001)이 상영되었으며, 이는 이후 도쿄에서도 상영된다. ‘입김’의 멤버들은 2008년 버클리 미술관의 심포지엄에도 참여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한다. 


  <아방궁 프로젝트>는 여성성의 특성을 강조하며, 여성 신체에 대한 기존 의미를 전복시키고, 재정의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전까지 저평가되었던 ‘공예’ 형식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도입함으로써 여성적 감수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는, ‘프로젝트가 폭력적으로 억압된 것은 문화의 벽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승소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 예술가의 표현의 자유를 공표한 최초의 사건이다’, ‘구체적인 성과를 얻어냈다’, ‘남성중심주의 담론에 갇혀 있던 민중미술 이후의 새로운 예술운동에 물꼬를 터주었다’ 등이 있다. 부정적인 평가로는 ‘페미니스트 미술 그룹이 한국 전통 유교 가치를 조롱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 ‘전위 문화 행사라는 이름으로 종묘를 욕되게 해서는 안된다’, ‘입김의 태도가 성급하고 무지했다’, ‘이런 류의 돌출 행동은 한국 페미니스트들에게 반감을 갖게 한다’ 등이 있다. 또한 종친회 역시 관람객의 입장이었으며, 그들에게 용인되지 못한 결과는 관람객의 다양한 입장을 고려하지 못한 지점이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는 ‘입김’의 행동주의 페미니즘 미술의 한계점으로도 볼 수 있다. 


  ‘입김’은 이후에도 다양한 미술 활동을 이어나갔다. 2004년 9월 부산 비엔날레에서 프로젝트 <섬-생존자>를 발표한다. 이는 부산의 한 관광지였던 섬에 감금되어 성노예로 학대당한 여성들이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여 겨우 섬에서 빠져나온 사례를 다룬 것이다. 2005년에는 경기 문화재단에서 후원을 받아 <사라지는 여자들>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는 웹 사이트를 기반으로 한 사이버 전시 형태를 가진다. 억울하게 죽어간 여성들에 대한 애도의 공간은 마련되지 않았음을 전제로 사이버에 애도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입김은 2006년 <사라지는 여자들> 이후 활동을 중단한다. 이후 2018년 6월 ‘입김’의 멤버 6인이 경복궁 앞에 모여 공식적인 그룹의 해체를 결정한다. 하지만 그룹의 공동창작의 형태만 아닐 뿐,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개인적인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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