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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 May 10. 2022

나로 산다는 것은

'작품과 나의 이야기' 글쓰기

<Three Studies of George Dyer(1966)>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었다. 타인을 볼 때 행복한 모습보다 불행한 모습에 초점을 두는 사람, 평화로운 일상에서도 늘 불안을 느끼는 사람, 사랑하는 이들이 옆에 있어도 외로워하는 사람. 아주 어릴 적부터 일기장에는 실존에 대한 물음들로 가득했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교우관계 또한 여느 또래처럼 평범했다. 어떠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부모님께서도 처음에는 ‘조금 진지한 아이’, ‘어른스러운 면이 있네’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고등학교로 진학했음에도 여전한 나를, 어느 순간부터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그렇다고 내가 늘 우울함에 빠져 일상생활을 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애썼고, 유익한 정보를 알게 되면 나누었으며 감정적으로 힘든 친구들에게 위로를 해주었다. 선생님도 특별히 나를 좋아하셨고 선후배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가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라앉을 때를 제외하고는 울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예술 반 친구들의 수업을 청강했던 적이 있다. 작가를 선택하여 발표하고, 작품 중 하나를 모작하는 수업이었다. 당시 문과 반이었던 나는 작가는 물론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도서관에 비치된 책을 보다가 ‘프랜시스 베이컨’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모작을 해야 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따라 그릴 수 있는 색면추상 느낌의 그림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 본능적으로 끌리는 부분은 고깃덩어리처럼 보이는 인체 표현이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작가 또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당시 질병취급 받았던 동성애적 성향과 예민한 감수성은 죽을 때까지 그를 괴롭혔다. 특히 개인의 성향 자체보다는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다수가 속한 그룹의 기준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사회는 결국 소수인 사람들이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그의 그림들은 굉장히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마치 정육점에 걸려있는 고기처럼 뭉개진 형상을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표현법이 오히려 솔직하다고 생각한다. 잔뜩 치장되어 오히려 어색해 보이는 인간상 대신 그의 발가벗겨진 형상에는 본질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뒤틀린 조지 다이어의 초상화를 볼 때, 관람객의 시야 또한 불명확하게 흐려지는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가 혼란한 것인가, 그를 보는 내가 혼란한 것인가. 이를 분간할 수 없기에 그림에 이입하게 되고, 그 속에서 나를 보게 된다. 엉겨 붙은 살과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초상은 위태로운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삶이 부끄러웠다. 화목한 공동체의 이단아가 된 기분이었다. 한 번 휘청거릴 때 마다 안쓰럽게 보는 시선들이 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내 취향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둡고 침침한 것을 좋아한다고. ‘왜 어두운 색의 옷만 입니?’, ‘왜 슬픈 시만 쓰니?’ 등 연관이 없는 부분까지 끌어와 괴롭혔다. 이를 벗어나려 애쓰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나에게서 나를 떼어내는 일인데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유명세를 타고, 작품이 고가에 판매되었음에도 그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힌 사회에 대한 병적인 반발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자체가 삶이고, 나의 일부이기 때문에 연인의 죽음이나 비평에도 굴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살았다. 작품 활동을 멈추지도 않았고 주제나 표현법을 바꾸지 않았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와 그의 그림 속에 나를 비춰보는 행동을 통해 무언가를 하나 깨닫게 되었다. 나도 그냥 이렇게 살기로 했다. 애써 좋은 쪽으로 바꾸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를 알아봐주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고, 내가 그의 작품을 보며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또 다른 나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나는 나로 살고,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며 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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