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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May 14. 2024

그런 의미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리뷰 및 해석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 및 비평, 리뷰

*스포일러*







신의 뜻대로, 결국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갑니다


: 하마구치 류스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해석, 감상평





 영화를 다 본 후 우선 느낀 점은 당혹스러움이었다. 그야말로 근래 본 5년 중 제일 불친절하고도 황당스러운 영화였다. 그러나 여느 리뷰평과 같이, 보고 난 직후의 평점은 5점이었으나 집에 와 곰곰히 생각하고 곱씹어보니 점점 나도 모르게 평점을 올리고 있던 마법 같은 영화였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국 신, 자연, 인간의 이야기이다. 이 점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우선 글을 시작하기 전 해당 글은 그 어떤 평론이나 리뷰나 해석을 보지 않은 필자만의 주관적인 해석임을 밝힌다.






 




독특한 구성, 연출

 

 필자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처음 보게 되었다. 해서 여러 모로 놀란 점이 많았다. 우선 보편적인 극의 전개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인데 해당 극은 그러한 형식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 발단-전개-전개-절정에서 무책임하게 끝내버린 느낌이 든다. 이것은 곧 류스케 감독의 연출 기법과도 연결될 수 있는데, 잘라도 되는 장면들까지 모조리 롱테이크로 길게 혹은 지루하게 화면에 넣음으로서 영화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매우 느긋느긋하게 만든다. 기승전결의 형식을 따르긴 하나 연출 방식부터 시작해서 인물들 간의 갈등조차 표현하는 그 방식이 매우 흔치 않다.


 보통의 극은 메인 갈등이 되는 이야기를 초반부터 그 윤곽을 보여주며 절정에 이르러서까지 점진적으로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드는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노골적으로 인물들 간의 갈등을 보여주지 않되 대사로서 은유적으로 말한다. 그러한 점에 있어 이 영화는 대중적이지 않고 어려운 극이다. 보통의 대중영화가 처음부터 갈등을 보여주고 갈수록 그 골을 깊게 만드는 데 반해 이 극은 대략 이런 문제가 있음을 대충 보여주기만 할 뿐, 직접적으로 그 어떤 언급도 결정적인 사건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색다른 플롯은 필자로 하여금 이 영화를 마치 다큐멘터리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게 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배우들의 연기도 그랬지만 갈등조차 극적이지 않고 그들의 자연스러운 대사, 잘라도 되는 장면들까지 길게 넣은 연출 등등으로 보아 정말 살아 있는 인간들의 삶의 한 순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이러한 플롯 형식은 분명한 장점이 존재하지만, 관객 10명이 있을 때 5명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상업적 영화로서의 실패를 말한다. 개인적인 취향으로 필자는 이런 식으로 무책임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독특한 예술영화 또한 있어야만 함을 인정하는 바이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랍시고 영화를 아예 ‘던져버리는’ 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해서 필자는 어설픈 필자만의 생각으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를 어림잡아 해석해보고자 한다.





 신, 인간, 자연


 우선 글을 시작하기 앞서 포스터에도 노골적으로 나온 메타포이지만- 딸 하나는 즉 사슴이자 자연이다. 그것을 늘 파악하고 해당 글을 읽는다면 훨씬 더 빠른 이해가 가능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제목을 영화를 보는 내내 상기했다. 끝나고 나서도, 아주 오랫동안 기억하며 그 뜻을 스스로 찾으려 했다. 우선 감독은 보다 쉬운 해석을 위해 대놓고 하나가 곧 사슴임을 보여주며 포스터에도 그러한 점을 부각시킨다. 필자의 해석으로, 타쿠미는 자연의 편도 인간의 편도 아닌 신神이라 보았다. 그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모든 캐릭터 중 유일하게 반말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심지어는 백발의 마을 회장조차 존댓말을 하는 상황에서 혼자 반말을 한 이유에 분명 영화적 복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2. 그가 글램핑장 사업에 있어서 찬성도, 반대의 의견도 내비치지 않은 점 3.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 라는 당연한 자연의 섭리를 영화 내내 언급했다는 점 4. ‘사슴’ 딸에게도, 연예기획사 인간들에게도 친절하지 않았다는 점, 이러한 점들로 보아 필자는 타쿠미를 신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했다. 심지어 그의 직업조차 흔치 않은, 또 어딘가 은유적인 ‘심부름꾼’이다. 신은 권력자도, 전지전능한 그 무엇도 아니다. 어쩌면 생의 순환이 잘 이어지도록, 그저 죽음과 태어남을 연결하는 심부름꾼 아닐까? 이것은 곧 타쿠미의 대사,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간다.’로도 연결된다. 그것은 곧 당연한 자연의 순리이자 법칙이다. 그는 자신의 순리대로 다양한 생을 잇고 또 끊으며 신의 역할을 다 한다. 이러한 복선을 필자는 또, 영화 초반부 하나와 함께 산을 걷다 사슴의 백골 시신을 보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하나에게 숲의 무언가 하나하나를 자세히 말하고 심지어는 죽은 사슴의 시신까지 보이며 자연의 섭리를 딸에게 가르친다. 필자는 이 또한 타쿠미가 맡은 상징이 곧 신이라는 것의 분명한 복선으로 보았다.


 이익에 눈 멀어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 그러한 인간들 밑에 방치된 자연. 그 모두를 그저 방관하고 있는 신. 신은 너그럽게 생명을 주다가도 매정하게 앗아간다. 그런 그의 섭리엔 그 어떤 악도, 선도 없다. 신은 그저 자신만의 생리를 지키며 세상의 균형을 지킬 뿐이다.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하나가 실종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밤중에 산에서 아이를 찾을 때, 탈색 머리 청년이 하나를 부르며 산을 내려가는데 그 옆에서 마을의 상류 물이 하류로 콸콸 넘쳐 흘러내려가는 물길이 타이트 샷으로 잡힌 장면이다. 하나, 곧 사슴의 죽음 또한 자연의 섭리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듯,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인간으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고 사슴 또한 죽는다.


 제일 의문스러웠던 장면은 바로 엔딩이다. 타쿠미는 내내 자신을 따르던 타카하시를 죽인다.(처음엔 기절로 보았는데, 일어나 걷다 다시 쓰러지는 장면을 굳이 넣은 것을 보아 기절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 것 같아 죽음이라 생각했다) 하나는 총 맞은 사슴 앞에 서 있고 타카하시는 그런 하나를 구하려다 저지당하는데, 너무도 뜬금없이 타쿠미에게 목을 졸린다. 이 장면에서 아마 많은 관객이 당황했을 듯하다. 필자 또한 그 장면부터 머릿속에 물음표를 지울 수가 없었다. 우선 이 영화는 마지막 살해 장면을 어떤 식으로 보는가에 따라 영화의 제목도, 주제도 받아들이는 바가 각자 다를 듯하다.




왼쪽부터 마유즈미, 타카하시



 누가 먼저 ‘살해’하였는가


마유즈미   그렇지만 결혼하고 싶으세요?

타카하시   하고 싶어.

마유즈미   어째서요?

타카하시   외롭잖아. 그게 가장 큰 이유 아냐? 코로나로 나도 꽤 우울했고.


 주목해야 할 점은 자연을 대하는 타카하시의 태도이다. 타카하시는 ‘외로워서’ 결혼을 하려는 인물이다. 그가 후반부 캠핑장 관리자를 자신이 하겠다며 갑자기 타쿠미를 따르는 것 또한, 애초부터 주민 모두가 반대했던 글램핑장의 설치를 당연시 여기는 오만함으로부터 온 태도이다. 타카하시와 마유즈미는 타쿠미와 우동을 먹을 때, 사슴이 다니는 길이라면 울타리를 설치하면 되는 것 아니냐며 조금도 자연을 이해할 생각이 없는 인간들이다. 타카하시는 얼핏 보면 다시 자연과 공존하려는 인간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그는 자연을 ‘외롭고 지친 도시 생활에 내게 주는 활력소’의 수단으로 여길 뿐, 절대 목적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야말로 쉬고 싶을 때 마음대로 오는 활력소로 자연을 대하는 오만한 생각으로 가득한 인간이다. 이것은 곧 그들의 글램핑장 사업과도 연결된다. 자연은 그들에게 제 품을 ‘활력소’로 잠깐 이용하라고 말 한 적 없다. 사슴의 길목 또한 막으라 한 적 없다. 해서 타쿠미는 묻는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인간은 때때로 자연을 이용하고 그들의 생리와 섭리에 관여한다. 마치 사슴의 길에 글램핑장을 만들고, 그들의 영역에 침범하는 주제에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하려는 것처럼.


 타카하시는 그러한 점에서 사슴=하나의 생애까지 관여하려 한다. 총 맞은 사슴과 눈 마주치고 있는 하나를 보자마자 구하려 달려든다. 모순적이게도 총에 맞은 사슴조차 인간으로 인해 벌어진 비극인데, 막상 그 광경을 보니 사슴이든 하나든인간은 우선 구하려 든다. 타쿠미는 제 딸을 구하려는 그를 막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타쿠미는 갑작스레 타카하시를 죽인다. 여태 관전자로 그저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일들을 지켜보기만 하던 신은 행동한다.


 등골이 싸늘해지는 대목이 바로 이것이다. 타쿠미는 자연의 섭리에 관여하려는 타카하시를 죽임으로서 마치 보는 관객들에게 경고하려는 듯하다. 사슴의 길목을 막으려는 것처럼, 자연스레 흐르는 물을 더럽히려는 것처럼, 멋대로 사슴에게 총을 쐈다가 멋대로 또 구하려 드는, 자연의 생 자체를 쥐고 흔들려 드는 인간의 오만함 자체를. 해서 타쿠미는 그를 죽였다가 코피 흘린 하나를 업고 유유히 설원을 빠져 나간다. 와중에 감독은 끝까지 혹시 이해 못한 관객이 있을까 친절하게도 이 장면을 넣어주었다. 총에 맞아 피 흘리는 사슴=코피 흘리는 하나, 라는 점을 노출시켜주어 하나가 곧 사슴과 자연을 뜻하는 것을 알려준 유일하게 친절한 장면이다.


 신은 죽은 사슴을 ‘심부름꾼’으로서 다음에 순환할 또 다른 생을 위해 업고 설원을 나가지만, 타카하시 즉 인간은 아니다. 처절하게 다시 일어났다가 외로이 걷다가 다시 쓰러진 타카하시의 모습은 새하얀 설원, 자연에 방치돼 비참하게 남겨진 인류 그 자체로도 보인다. 오만했던 인간은 자신이 파괴하고자 했던 자연에, 아주 조그맣게 나타나 픽 쓰러진다. 인류의 존재 또한 자연의 일부인 법. 인간은 죽어서야 자신들이 이용했던 대자연에 파묻히며 나약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한다. 카메라 또한 타카하시를 멀리서 포착하여 그가 새하얀 설원에 그야말로 ‘잡아먹히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어떤 곳에도 악은 없다


 자연과 신, 그리고 인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셋의 구도를 간단하고도 어렵게 표현하여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수많은 해석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런 극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이렇게 해석의 길이 다양하기에 극작과 학생으로서 다양한 메타포와 그 작동 원리를 연구할 수 있게 되어 분명 장점은 있는 듯하다. 다만 이러한 복선들을 하나하나 캐치할 수 없는 일반 관객에게까지 친절하게 그 의미가 와닿을 수 있도록 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그러지 않기에 이 영화가 불친절하고 매력 있는 작품으로 남을 수 있긴 하지만, 앞으로 영화를 만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적인 예시를 본 것 같아 좋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생을 걷어가고 생을 주는 것은 선물도, 악행도 아니다. 신은 그저 이 세계의 생리를 맞추기 위해 인간과 자연의 균형을 관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죽였던 것처럼, 신의 경고 또한 과연 악이라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있어서 인류를 되돌아본다면 어떨까. 멋대로 사슴을 쏘고, 멋대로 사슴을 구하려 드는 인간의 오만함.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엔 그들만이 잘 살려 드는 오만한 이기심이 있을지라도, 신이 그러한 인류를 처벌하는 데엔 그 어떤 악도 없다. 신은 그저 자연의 균형을 깨려 드는, 계속해서 자연의 섭리에 관여하는 인간을 멈추게 한 것뿐이다.


 오히려 우리는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죽였다’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누가 먼저 살해를 행했을까? 누가 먼저 사슴에게 총을 쏘았을까? 그런 질문과 함께 다시금 이 영화를 제목과 본다면 다른 의미로 모두에게 다다를지 모른다. 당신이 보는 이 세상에 악이란 존재하는가. 한없이 매정하기도 했다가, 한없이 다정하기도 한 신과 자연의 행동에 과연 악이란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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