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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그림과 도자기

언제나 거실은 나의 작품들로 빼곡하였다

by 영롱한 구슬

초겨울을 알리는 늦가을비가 내리면 나는 사라진 "해바라기염색화 그림 " 한 점을 추억한다

도자기작품 "두 마리의 학"이 생각난다

다행히 현재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도자기 작품 "쌍학"이다

언제나 엄마의 단층양옥집 거실 벽에 걸려 있던

나의 여러 작품들

그중에서도 특히 애착이 더 많이 가는 그림은 염색화 기법으로 그려낸 해바라기들이다

그 그림 중에서 대작으로 그려 낸 해바라기는 파라핀을 얇게 펴 바른 후 크랙을 내며 물감을 입혀서 말린 후 다시 찜기 속 고온에서 파라핀을 빼내고 말리고 다린 독특한 염색화 기법의 작품이었다 그래서 더 많이 애착이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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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잃어버린 작품들이 너무 많았다

나름 심혈을 기울여 그린 애착그림들 중

그 속에 감추어진 추억들, 영상들ᆢ

나의 그림과 공예품들은 나의 분신이다

나의 도자기 ᆢ청화 백자/ "쌍학"

학의 형상을 하며 어렵게 흙을 빚어서 만들고

1977년 경기 이천 도자기 실습실에서

고온(약 1000°C-1100°C)으로 구워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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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몰 나의 작품들을 가져간 사람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작품을 잘 관리 보관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고 성공한 작가는 아닐지라도ᆢ

작가로서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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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작품도 있었지만 특히 염색화 그림들이 많이 생각난다 고생하고 말 많고 오해받았던 작품들 그중에서도

흰 옥양목천에 그린 해바라기 염색화 그림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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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하늘아래 하늘거리며

호숫가를 바라보고 서 있는 노란 해바라기의 군락이

바람이 부는 데로 물결 따라 춤을 추듯 서 있는 그 그림은

결혼한 후 집이 너무 좁아서 보관할 곳이 없어서. 엄마네 집에 그냥 보관해 두기로 하고 집이 좀 넓어지면 가지고 가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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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의 그림과 공예품들을 아버지께서 너무 좋아하셔서

그냥 단층양옥집주택 거실에 두고 전시해 둔 채 결혼과 함께 갖고 나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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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 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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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전 엄마네 주택의 넓은 거실은 나의 미술 작품들로 가득 찬 나의 개인 전시 공간이었다

결혼 후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서

나의 애착 물건들을 그대로 두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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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버지께서도 작가만큼 딸의 작품들 모두를 분신처럼

아끼고 사랑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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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도자기작품 몇 개 소품 몇 개 도로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만 갖고 나왔다

주물로 만든 캔디볼, 캔디볼도 잃어버렸다

나무 캔디볼 향나무조각선반등 보관하고 이동하기 좋은

소품 몇 개만 겨우 서울로 가지고 왔다

대구에서 살 동안 사사건건 벌 때 같이 달려드는 시댁식구들을 뒤로하고 남편만 바라보기로 하고 3년 만에 학교교직을 관두고 남편 따라 서울로 이사 왔어야 했다

말 많고 탈 많았던 시댁식구들과 친정식구들 틈바구니

사이에서 나는 샌드위치가 되어 너무 힘들었다

우울증은 극에 달 하였고

내 인생의 모든 것에 새 판을 짜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하였다

나는 자유를 갈구하였다 그들의 시끄럽고 다양한 요구들을 다 받아 들일수가 없었고 그때 당시 엔 능력도 안되었다

숨이 막혀왔다 나는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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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서울 발령으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자 딸의 작품활동을 항상 응원하고 지지해 주셨던 아버지!

아버지께 작품보관을 잘 부탁드리고

소품 몇 개 만 갖고 서울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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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와 생각이 많이 다르셨다

엄마네 집에 갈 때마다

거실의 작품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엄마는 나의 그림과 공예품들을 한두 점씩 아는 지인들에게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어 쓰신다고 하였다

너무 서운 하였지만

해바라기그림과 학그림은 절대

작가인 내 허락 없이는 못 팔게 하자

엄마는 식구가 없어서 이렇게 큰집은 필요가 없어서 작품을 다 가지고 가라며 몹시 서운해하셨다

화가 났지만 꾹 눌러 참으며 하는 수 없이

해바라기그림과 학 두 마리가 날개를 펴고 마주 보고 있는 염색화 그림 두 점을 꽁꽁 싸매어서

서울아파트로 어렵게 갖고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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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보러 다니며 작품을 보관할 수 있는 복도식 아파트의 귀퉁이 끝집을 계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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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은 창고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은 복도식 아파트

맨 끝집이었다 로열층중간집보다 매매가가 조금 사게 나왔다 내가 원 하는 가격대 가까이 왔을 때

가격 흥정을 하여 어렵게 계약체결을 하였다

그림창고로 사용하기에 " 딱 "안성맞춤이었다

입주 전 약간의 수리만 하고 도배와 전등을 갈고 복도 끝에 도어문을 달아서 잠금장치를 하려는데ᆢ아파트관리실에서

잠금장치를 달면 안 된다고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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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시설이라며 주민의 민원이 들어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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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의 맨 끝집이라 할지라도 법적으로 공용복도 끝에 도어를 달고 잠금장치를 개인적으로 해서 개인창고로

사용할 수가 없다고 해서 벙어리손잡이도어문을 리실 허락하에 달고 사용허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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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품보관할 창고가 절실히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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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유난스러운 사람 한두 명의 민원 때문에

어쩔수 없다고 이해 하시라 고 하였다

그냥 벙어리 도어문을 달고 잠금장치 없이 문을 꼭 닫고 사용하시라고 관리실에서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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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끼는 해바라기그림 대작을

복도 창고 맨 귀퉁이에 몇 겹의 포장을 하여 보관 중이었다

매년 매달 매주 수시로 확인을 하고 작품을 점검하곤 하였는데ᆢ가끔 뜸하게 바쁘게 한두 해를 보내던 시기가

있었고 해바라기작품에 대한 생각은 점점 잊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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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큰 거실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된 날이 왔다

이삿짐을 꾸리기 위해 창고문을 열고 들어가서 작품들을 확인해 보니

내가 아끼던 해바라기 작품 1점 대작이 사라지고 없었다

당연히 포장재로 잘 포장해 두고 구석에 잘 밀어서 보관하고 있었는데ᆢ왠 일?, 좀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것 같았는데ᆢ

해바라기 염색화 대작 한점 그 그림만 없어졌다

그 해는 왜 그리도 가을비가 많이 내렸는지ᆢ 이삿짐을 꾸릴 때는 함박눈까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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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리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 나의 해바라기 염색화 대작그림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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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었던 그때 당시를 추억하며

애써 재현하려고 끄적여 보았지만

대작으로 그려냈던 열정이 가득했던 젊은 날의 염색화 "해바라기"

는 더 이상 그때의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이제는 손이 많이 굳어져서

염색화 기법이 아닌 수채 색연필로

어른동화책 속의 그림 이야기로

가끔씩 글을 쓰며

삽화그림으로만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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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록지 않는 작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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