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계쓰홀릭 Feb 08. 2024

나의 아름다운 장롱면허 탈출기(3) - 완결

소소한 에세이 자유주제


  며칠 전에는 밤길을 걷다가 무심코 도로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그냥 빨간 불빛으로만 보였던 후미등 행렬을 보며 ‘다들 브레이크를 밟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나도 모르게 하고는 빙긋 웃었다. 깜빡이도 켜지 않고 끼어드는 차를 보며 투덜거리도 하고, 곧 신호가 바뀔 것 같은데 사거리 앞에서 멈칫거리는 차를 보면 “갈 거면 빨리 가지 뭐 하는 거야”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어느 주말에는 난생처음으로 혼자 두 아이를 태우고, 경기도에 있는 친구네 집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닌 거리였지만, 나의 과거를 아는 친구들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나를 맞이하며 박수를 쳐주었다.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은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귀걸이나 염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른의 자유' 말이다.


 도서관에 다녀오던 그날 밤, 심하게 긁어버린 오른쪽 문짝은 바로 고칠까 하다가 몇 번 더 긁을 것 같아서 영광의 상처로 일단 남겨두었다. 예상대로 나는 그 후로 어느 비좁은 골목길에서 남의 집 담벼락도 긁고, 바쁜 출근길에 이중 주차되어 있는 새하얀 SUV도 뽀드득 긁고, 어떤 날에는 다른 이중 주차된 차를 피하고자 심하게 꺾다가 오른쪽에 있던 벤츠 차량에 '콩'하고 부딪힌 적도 있다. 다행히 벤츠 차주분께서는 찬찬히 차를 살펴보시고는 그냥 가라고 해주셨다. 나도 언젠가 그렇게 쿨하게 상대방을 보내줄 수 있을까?

  아이들은 우리 차를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으니 좋은 점이 있다고 한다. 남편 말로는 그 스크래치 덕분에 아마 다른 차들이 피해 주어서 우측으로 끼어들기가 편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녹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대로 둘 예정이다. 사우나에서 상대방을 긴장하게 하는 조폭의 문신처럼.


  혼자서 처음으로 주유하기, 자동차 정비소에 가서 엔진오일도 갈고 전체적으로 점검받기, 직장 동료를 태우고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기, 따릉이 타기에 너무 추운 오늘 같은 날 남편을 태워서 전철역에 내려주기 등 장롱 면허를 탈출한 뒤의 내 삶은 ‘자동차와 함께하는’ 여러 가지 퀘스트들로 채워지고 있다. 오늘은 퇴근길에 어떤 낯선 이름의 아파트에 들러 중고 장난감을 나눔 받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퀘스트를 해치우다 보면, 언젠가 가족들을 모두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려 내 고향 부산에 가는 날도 오겠지?! 그때쯤에는 남편에게 ‘새 문짝’을 선물해 줘도 괜찮겠다. 물론 남편은 '새 문짝'이 아닌 '새 차'를 원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직도 초행길에서는 내비게이션을 보느라 정신없지만, 늘 다니던 길에서는 네비를 끄고 음악을 먼저 트는 여유가 생겼다. 내가 운전을 못하던 시절 오며 가며 나를 태워주고 내려주던 숱한 사람들의 노고와 따뜻한 배려를 떠올리면 새삼스럽게 고마워지는 요즈음이다. 따뜻한 자동차에 앉아 편안하게 출퇴근하며 보는 첫눈 내리는 풍경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스무 권이 넘는 그림책을 빌려 가며 끙끙대는 나를 보고 동네의 작은 도서관 사서님은 무겁겠다며 걱정하시지만 지하주차장에 세워둔 차 덕분에 그 무게가 이제는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다. 장롱면허 탈출이 나에게 가져다준 이러한 소소한 행복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지고 있으므로 앞으로도 내 삶을 조금은 더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끝-

작가의 이전글 나의 아름다운 장롱면허 탈출기(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